<주철환의 음악동네>'잊은 줄 알았었는데'.. 노래가 상기시켜준 '중학교 단짝친구'

기자 2021. 1. 1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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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입학식 날 담임선생님은 60여 명을 키 순서대로 복도에 세웠다.

유독 나를 열광시킨 노래 제목은 뭐랄까 인류 역사상 가장 흔한 말이면서 아름다운 말, 그래서 사라지지 않는 말인 '아이 러브 유'였다.

불현듯 노래 하나가 인화물질에 닿은 건 록밴드 피플이 그 지역 출신인 까닭이다.

드디어 나는 그 친구를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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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환 프로듀서·작가·노래채집가

김목경 ‘부르지 마’

중학교 입학식 날 담임선생님은 60여 명을 키 순서대로 복도에 세웠다. 그 녀석과 나는 앞뒤에 섰다는 이유로 짝이 됐다. 얼굴은 하얗고 말씨는 조곤조곤했다. 유순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가는 것은 방과 후의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우리 가게엔 낡은 트랜지스터라디오밖에 없는데 친구네 집 2층엔 별표전축이 있었다. 알록달록한 표지의 레코드가 도열해 음악의 성처럼 보였다. 내성적 자아는 명곡 앞에서 무기력했다. 뜻도 모르면서 우리는 비틀스의 ‘헤이 주드’를 소리소리 지르며 뿜어냈다. 뒤로 갈수록 ‘나나나 나나나나’가 반복돼 따라 부르기는 그만이었다. 친구 어머니가 한참 동안 과일을 들고 서 계신 줄도 몰랐다.

그런 용어를 쓰진 않았지만 당시의 소년들에게도 아이돌이 있었다. 그중에도 펄시스터즈는 진주처럼 반짝였다. 누나들은 ‘커피 한 잔’ 같은 신중현의 창작곡뿐 아니라 번안곡도 많이 불렀다. 유독 나를 열광시킨 노래 제목은 뭐랄까 인류 역사상 가장 흔한 말이면서 아름다운 말, 그래서 사라지지 않는 말인 ‘아이 러브 유’였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 사춘기 소년을 흠뻑 빨아들였다. ‘그래요 하지만 그 말이 안 나오네요/ 뭐라고 말할지 전 모르겠어요(Yes I do but the words won’t come/ And I don’t know what to say)’.

어떤 노래는 온도와 습도, 또 어떤 노래는 경도와 위도가 맞을 때 산란한다.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미국 서부도시 새너제이는 유달리 햇살이 강렬하다. 불현듯 노래 하나가 인화물질에 닿은 건 록밴드 피플이 그 지역 출신인 까닭이다. ‘아이 러브 유’는 피플이 1968년에 리메이크(원곡은 좀비스·Zombies)한 곡이다. 이름이 ‘피플’(People!·느낌표 포함)인 것은 당시 비틀스, 버즈, 애니멀스 같이 동물을 내세운 그룹들에 맞서 ‘인간’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음악은 부서진 기억을 연결시킨다. 드디어 나는 그 친구를 찾기로 했다. 어렵사리 연락처를 알아냈고 마침내 통화가 됐다. 나는 옛날 노래까지 불러가며 세월을 거슬러 헤엄쳐갔는데 친구는 도통 반응이 없었다. 말은 어눌했고 내뱉은 몇 마디조차도 불협화음이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 다른 친구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는 한순간 나의 말문을 막았다. 젊은 나이부터 그는 이미 상당한 단계의 치매를 겪어왔다는 거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걸어온다. 인터넷뉴스가 가상현실(VR) 역할을 맡은 덕분이다. 치매를 앓는 호주의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반복해서 들려주는 아들에게 “내 아들 이름도 세바스찬이지만 넌 내 아들이 아니야”라고 부인하다가 갑자기 예전에 아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 ‘우린 다시 만날 거야(We’ll Meet Again)’를 부르기 시작한다. 원곡과 다른 실존의 이름들이 노랫말에 새겨진다. ‘잉그리드는 햇살 눈부신 날에 세바스찬을 만나고 싶어/ 왜냐하면 잉그리드는 세바스찬을 무척 사랑하거든’. 모성의 힘으로 어머니는 기억을 기적으로 만드신 거다.

‘오늘 밤 우연히 라디오를 켤 때/ 당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잊은 줄 알았었는데/ 잊혀졌다 했는데/ 당신은 노래를 만들었네요’(김목경 ‘부르지 마’ 중). 블루스 기타리스트 김목경이 고등학교 후배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 후로도 그를 만나본 적은 없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말은 거짓이다. 나는 외로울 때마다 그를 노래로 만나기 때문이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김광석이 불러 국민가요가 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김목경이 영국 유학 시절에 만든 노래(1988년)다. “광석이는 유명과 무명의 경계선이 없는 순수한 친구였습니다. 처음과 끝이 같은 놈이었죠.”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부르지 말라 해도 나는 자꾸 그의 이름을 부른다. ‘햇살은 눈부셨는데/ 우리를 비추었는데/ 오늘은 나 혼자 비를 맞고 가네’(김목경 ‘부르지 마’ 중).

작가·프로듀서

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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