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법 앞에 붙여지는 슬픔

김재태 편집위원 2021. 1. 1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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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새해 벽두부터 우리 사회가 큰 슬픔으로 뒤덮였다.

태어난 지 겨우 16개월밖에 안 된 어린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참극이 모두의 마음을 흔들었다.

온라인에서는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가 줄을 잇고, 아이의 시신이 묻힌 묘소와 양부모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법원 앞에는 혹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난 마음들이 모여들었다.

법이 일찌감치 앞장서서 아이들을 지킬 궁리를 하고 빈틈을 메웠더라면 그 어린 생명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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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김재태 편집위원)

2021년 새해 벽두부터 우리 사회가 큰 슬픔으로 뒤덮였다. 태어난 지 겨우 16개월밖에 안 된 어린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참극이 모두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법 앞에 그 아이의 이름이 붙여졌다. 

'정인이'로 불리는 그 아이는 자신의 양육을 책임진 양부모에 의해 온갖 학대를 받은 끝에 세상을 떠났다. 아이가 폭력에 시달리다 죽음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끔찍해 그 양부모를 향한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아이에 대한 추모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입에서 입으로 하염없이 이어진다. 온라인에서는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가 줄을 잇고, 아이의 시신이 묻힌 묘소와 양부모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법원 앞에는 혹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난 마음들이 모여들었다.

1월6일 오전 경기 양평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지에 안장된 정인이의 묘지에 사진이 놓여 있다. ⓒ 연합뉴스

아이들에게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 발생하면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 어른들의 마음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전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번 정인이 사건도 마찬가지다. 직접적인 가해자는 정인이의 양부모지만, 그 비극의 원천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하고 있음을 안다. 그래서 '정인아 미안해'라는 마음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넘치듯 흐르고, 격한 회한이 추모 화환 속에 담기는 것일 터다.

형태는 각기 다르지만 정인이를 향해 쏟아지는 이 모든 안타까움과 미안함에 공통으로 담긴 것은 공동체의 반성이다. 거기에는 몇 번의 기회를 어이없이 놓쳐버린 데 대한 아쉬움도 함께 자리한다. 세 차례나 정인이에 대한 학대 신고를 접수하고도 그때마다 내사종결하거나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경찰이 그랬고, 학대 사실을 소홀하게 넘겨 책임을 저버린 아동보호전문기관이 그랬다.

정인이 사건이 알려진 후 국민의 공분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등을 뜨겁게 달구자 정치권이 모처럼 바삐 움직여 이른바 '정인이법(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 그 법안에는 아동학대범죄 신고가 있을 때 지방자치단체나 수사기관이 즉시 조사나 수사에 착수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 등이 담겼다. 또 아동학대범죄 신고를 접수한 사법경찰관리나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이 출입해 조사할 수 있는 장소도 확대했다. 모두 이 사건에서 드러난 법의 사각지대를 보완하기 위해 부랴부랴 만들어 넣은 규정들이다.

이번 정인이법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도로교통법과 관련한 '민식이법' '태훈·유찬이법'과 같이 아이 이름으로 불리는 법이 여러 개 존재한다. 이들은 어찌 보면 모두 '사후약방(死後藥方)'의 비겁한 고백이자 염치없는 면피 행동에 다름 아니다. 법이 일찌감치 앞장서서 아이들을 지킬 궁리를 하고 빈틈을 메웠더라면 그 어린 생명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개정되어 나온 법안 앞에 붙은 정인이란 이름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진다.

정인이도, 민식이도, 태훈이도, 유찬이도 모두 다른 아이들처럼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아보라고 정성을 들여 지어졌을 이름들이다. 그런 이름을 지닌 아이들이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생을 짧게 멈춘 채 법의 이름으로 불려 나오는 이 불편한 아이러니를 언제까지 용납할 것인가. 

아이들의 이름이 법 앞에 붙는 비극의 릴레이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 아둔한 망각에 더는 무너지지 말고 이 슬픔을 오래도록 기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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