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광화문 광장病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2021. 1. 18.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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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궐선거 비용 미납한 서울시, 791억 들여 광화문광장 공사.. 광장 없으면 공론장 없나
20년간 뜯고 바꾸고 몸살, 광화문 앞이 길이었을 때 역동적인 번영 일궜다

4월 7일에 실시되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관리 비용은 서울시가 부담해야 한다. 물론 이 돈은 국민 세금에서 나온다. 액수는 487억5000여만원인데 작년 11월이 납부 기한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서울시는 40%쯤 되는 178억4000여만원이나 미납하고 있었다. “급작스럽게 선거가 잡히면서”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같은 달 서울시는 총 791억여원 규모의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공사를 시작했다. “시장 궐위 상황에서도 전임 시장 때 논의한 사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는 것이 시민과의 약속”이라는 설명과 함께다.

서울시가 새로 만든다고 내놓은 광화문 광장 조감도/서울시 제공

예산상 문제로 보궐선거 비용을 제 날짜에 낼 수 없는 형편에 광장 재공사에 들어가는 막대한 금액은 어떻게 마련하는 것일까? 전임 시장의 남부끄러운 죽음 때문에 선거가 치러진다면 시장 대행의 일차적 책무는 선거 절차에 적극 협조하는 것부터가 아닐까? 게다가 사업 자체의 타당성도 여전히 시빗거리다. 일반 시민들의 불편은 고사하고 광화문광장 재조성사업 계획 과정에 동참한 전문가나 시민단체들조차 졸속 착공을 비난하고 있다. 또한 선거 이후 이 사업은 어떤 운명을 새로 만날지 모른다. 그럼에도 서울시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광장’이라며 광화문광장을 또다시 공사판으로 만들고 있다.

하긴 광화문 일대는 거의 20년째 영일(寧日)이 없다. 2000년대 초 월드컵 거리 응원과 각종 촛불 집회가 촉발한 광화문광장 조성 사업은 수많은 논란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2009년에 공식 종료되었다. 하지만 8년도 채 지나지 않은 2017년, 광장발(廣場發)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하여 재조성 사업 계획이 갑자기 부상했다. 광장이 없으면 도시가 아닌 듯, 광장이 없으면 선진국이 못 되는 듯, 광장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는 듯, 무엇보다 광화문광장이 아니면 대한민국의 시민 공론장이 없어지기라도 하는 듯, 목하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일련의 광화문 광장병(廣場病)에 집단감염된 느낌이다.

광장은 문화적으로나 지형적으로나 유럽의 독특한 전통이다. 굳이 광장이 문명의 보편적 표준이 될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광장은 민주주의와도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어서, 전체주의의 무대가 될 때도 많다. 광장의 유무나 개수 및 사회적 역할은 필요와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 이에 비해 지금 우리는 광화문 한복판에 국가 대표 광장 하나쯤 꼭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나 과잉 의지에 쫓기고 있다. 광장이 없었던 우리나라에서 한말 이래 그나마 광장사(廣場史)를 써 온 곳은 오히려 ‘서울광장’이다. 시청, 시의회, 고궁, 교회, 언론사, 호텔, 시장 등이 가까이 있는 그곳은 형태나 기능의 측면에서 나름 서구식 광장 분위기를 낸다. 이에 비해 광화문 광장안(廣場案)은 애당초 억지나 무리였다.

워낙 광화문 앞은 길이었다. 조선시대에 그곳은 양측에 관아(官衙)가 늘어선 통칭 육조거리였다. 17.4m 규모로 폭은 넓었지만 길이는 130m 정도로 짧았다. 길은 앞으로 쭉 뻗는 대신 종로 쪽으로 틀어지면서 현재 광화문사거리 부근 황토현에서 멈췄다. 그곳에서 숭례문 방향으로 직진하는 큰길이 난 것은 고종이 경운궁을 정궁(正宮)으로 삼으면서였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개화와 자주의 길이었다. 대한제국 말기와 식민지 초기, 광화문 거리에는 모든 신작로의 출발과 중심을 알리는 도로원표(道路元標)가 자리 잡았다. 말하자면 광화문 대로가 이 땅에 근대화의 문을 처음 연 셈이다. 한반도의 미래를 대륙 문명이 아닌 해양 문명에서 찾기 시작한 진입로였던 것이다.

일제시대에 광화문통으로 불리던 그 길은 해방 후 세종로 혹은 세종대로로 거듭났다. 특히 박정희 정부에 들어와 세종로는 너비 100m, 왕복 20차로로 대폭 확장되어 한동안 세계에서 가장 넓은 길이었다. 작가 김훈이 “길은 명사라기보다 동사에 가깝다”고 했듯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을 일궈낸 일등 공신 가운데 하나는 세종대로 특유의 거대한 역동성과 속도감이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세종대로는 국내 최대는커녕 시내 최대도 아니다. 광화문광장 조성 단계에서 이미 왕복 12차로로 줄어든 길은 재조성 사업이 끝나면 7~9차로로 더욱 좁아진다.

광장 무용론이나 반대론이 아니다. 사정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얼마든지 만들고 고칠 수 있는 게 광장이다. 하지만 적어도 광화문 앞은 광장이 아니라 도로가 제격이자 제멋이다. 20여 년째 몸살을 계속 앓고 있는 광화문광장 공간의 수난이야말로 호박에 어떻게 줄을 그어도 결코 수박이 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유감없이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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