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톡] 자유 늘어나도 '루틴'이 있어야 충만하다

박소령 대표 입력 2021. 1. 18.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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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시작부터 채용 면접을 부지런히 보는 중이다. 그런데 작년 가을부터 눈에 들어온 흐름이 하나 있다. 요즘 가장 인기 많은 디지털 문서 도구 ‘노션(Notion)’을 사용해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특히 20대 지원자 중 절반은 노션을 쓴다. 유려한 디자인을 갖춘 템플릿을 제공하고, 사용자 입맛에 맞게 세세히 개인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2016년에 만들어진 노션은 전 세계 400만명이 넘게 사용 중이고 기업 가치는 2조원이 넘는다.

노션으로 만든 이력서에는 사진, 영상은 물론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각종 자료가 하이퍼링크로 걸려 있다. 기업이 제시하는 양식에 맞추어 자신을 소개하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제는 나 자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식을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도구가 나타난 것이다. 정보의 풍성함을 전달하는 차원이 다르다.

다만, 나는 노션이 제공하는 광활한 자유로움이 오히려 부담스러운 쪽이었다. 다른 신경 쓸 일도 많은데 문서의 템플릿까지 일일이 골라서 개인화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있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백지에서 쌓는 것보다는 믿을 수 있는 최상의 선택지 몇 가지 중에서 고를 수 있는 자유였다. 구글 안드로이드보다는 애플 iOS를 편안하게 느끼는 것도 이와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던 중, 작년 말 ‘퀸스 갬빗'을 보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역사상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이 드라마의 주인공 베스 하먼은 체스 선수다. 여덟 살 때 보육원 관리인에게 체스를 배우기 시작했고, 천재성을 전 세계를 상대로 거침없이 펼쳐보이는 동시에 인간으로서도 성숙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드라마 중간 즈음, 베스는 잡지 인터뷰를 하며 체스 보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단 64칸으로 이뤄진 하나의 세상이잖아요. 그 안에선 안전한 느낌이에요. 제가 주도하고 통제할 수 있으니까. 예측 가능하고요. 다치더라도 제 탓인 거죠.”

개인의 자유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이며, 중요한 건 개인이 편안하게 느끼는 자유로움의 수위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노션과 같이 개인에게 무한대의 선택지를 주는 서비스와 애플과 같이 최적화된 운영체제를 고안해서 고객에게 전달하는 서비스가 공존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에게 주어진 가장 대표적인 자유의 대상은 시간이다. 마치 베스에게 64칸 체스 보드가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24시간, 1주일, 365일이 있다. 코로나 이후 재택근무가 일상화하면서 개인이 누리는 시간의 자유가 급증한 것과 비례해서 늘어난 것이 ‘루틴’ 혹은 ‘리추얼’이다. 생활변화관측소 분석에 따르면, 2016년 대비해서 2020년 소셜미디어에서 루틴에 대한 언급량이 7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2021 트렌드노트'에서는 “코로나 이후 루틴은 더욱 중요한 키워드이자 실천 덕목이 되었다. 통제 불능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일과를 계속해서 꾸려가는 것. 이는 불안정의 시대에 안정감과 통제감을 제공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2021년 내가 만들기 시작한 루틴은 출근 후 한 시간을 생각하는 데만 오로지 쓰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아침, 사무실 한편에 앉아 노란색 종이 패드와 펜 한 자루만 가지고 생각을 자유롭게 적어나간다. 개인의 자유와 충만한 루틴은 이렇게 함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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