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의 날씨와 얼굴]동물을 마주하는 얼굴에 대하여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입력 2021. 1. 1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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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새해부터 조금 더 긴 칼럼 지면이 주어졌다. 이 지면에 ‘날씨와 얼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검정치마의 노래 가사처럼 “나는 날씨 얘기 하나만으로 충분하고 쉽게 편안할 수가 있는 그런 사이를 원했”으나 “마주 앉은 거리는 좁힐 수 없”다. 날씨는 더 이상 편안한 대화 주제가 아니며 우린 마스크를 쓰고도 2m씩 떨어져야 하는 세상에 산 지 1년째다. 얼굴을 가릴수록 더욱 더 얼굴에 대해 쓰고 싶어진다. 반갑고 아름답고 복잡하고 애처로운 얼굴들에 대해. 거기엔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얼굴을 가진 우리는 가속화될 기후위기 앞에서 모두 운명공동체다. 날씨의 지배를 받는 지구 생명체 중 특히 유심히 바라본 얼굴들에 대해 다루려 한다. 그 얼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사람으로서 쓸 것이다.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동물의 얼굴 또한 마주하고 싶다.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이 시절의 대면은 주로 화면을 통한 경험이다. 코로나 이전에도 오프라인에서 보는 얼굴보다 온라인에서 보는 얼굴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동물의 얼굴에 관해서는 특히 그랬다. 인터넷에는 귀엽고 웃긴 동물 영상과 이미지가 범람한다. 동물을 이렇게까지 귀여워하는 시대는 없었다. 한편 동물을 이렇게까지 많이 먹는 시대 또한 없었다. 그 간극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귀여운 동물 영상은 동물을 잊고 있다. 윤기 나는 고기 영상 역시 동물을 잊고 있다. 두 영상이 나란히 놓인 풍경을 유튜브에서 본다. 그러나 유튜브에는 세상 거의 모든 것이 있지 않나. 아주 드물지만 동물을 잊지 않은 영상도 그곳에서 발견한다. 동물이 무엇인지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 흔치 않은 작품이다. 제목은 ‘동물심 번역기(Animal Mind Translator)’.

이 영상의 장르를 나는 20분짜리 SF 영화로 분류하고 싶다. 지금 이 세계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며 과학기술이 다양한 생을 어떻게 바꾸는지 상상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1876년에 그려진 헨리 홀리데이의 삽화를 패러디하며 시작해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진행된다. 몇 마리 돼지를 중심으로 영화와 정치의 역사를 다시 쓴다. 그 세계관에서도 대형 포털사이트의 언어 번역기는 건재하다. 다만 아주 중요한 기능이 생겼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 등 세계 각국의 언어 목록 사이에서 ‘동물어’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물어를 추가한 번역기가 어떤 모양으로 작동되는지 당신은 상상할 수 있는가? 더 다양한 상상력이 모이기를 나는 소망한다.

얼굴을 가진 우리는 운명 공동체
동물을 귀여워하며 또 먹는 시대
이동시 제작 ‘동물심 번역기’ 영상
동물들의 정치적 몸짓 해석 시도
공장식 축산이 기후위기 가속화

인기 없는 상상을 먼저 시작하며 이 영상을 만든 이들은 이동시(@edongshi)라는 이름의 창작 집단이다. 김한민 작가, 김산하 박사, 정혜윤 PD, 현희진 시인이 주축을 이룬 팀으로서 ‘이야기와 동물과 시’를 다룬다. 동물을 ‘이동하는 시’로 여기기도 한다. 이동시는 말한다. “인류 역사에서 ‘동물심’은 철저히 무시되거나 인간 편의에 의한 해석을 강요받았다. 신체를 구속받지 않을 권리, 타인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는 가장 대표적이고 기본적인 욕구이자 권리다. 이를 쟁취하려는 몸짓이 인간과 동물의 행동에 공통적으로 드러난다면, 이 유사성들을 번역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동물심 번역기’는 비인간동물의 정치적 몸짓을 해석하려 시도하는 작품이다.

여기엔 또 다른 장면도 있다. 어느 화창한 날이다. 수십마리 돼지를 쌓은 트럭이 도로를 달린다. 도살장으로 가는 길일 테다. 그중 한 마리 돼지가 고개를 들어 트럭 바깥을 본다. 잠시 망설이더니 그는 달리는 트럭에서 뛰어내린다. 도로에 온몸이 내동댕이쳐지지만 그렇게 한다. “나라도 뛰어내렸을 거야.” 내가 중얼거리자 나의 친구 현희진 시인이 대답했다. “동물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 선택하고 싶어 하는 존재야.” 그것은 나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돼지를 보며 나는 정치적 몸짓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공장식 축산 시스템은 1960년에 시작된 이후 기후위기를 가속화시켜 왔다. 인간은 덜 끔찍한 날씨 아래에 살기 위해서라도 육식을 줄여야 한다. 이해하는 능력 때문에 덜 먹을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번역할 수 있다면, 알아보거나 알아들을 수 있다면 지금처럼 동물을 먹을 수는 없게 된다. ‘동물심 번역기’의 조회수는 현재 100회를 조금 넘는다. 100만 조회수를 훌쩍 넘는 ‘힐링되는 동물 영상’ 시리즈의 조회수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하다. 그래도 나는 상상한다. 영상을 재생하고 20분간 마주하는 사람의 얼굴을. 잊혀진 얼굴들을 똑바로 보는 사람의 얼굴을. 한쪽 눈은 과거에, 다른 쪽 눈은 미래에 두는 얼굴일 것이다. 머리와 입의 중간에 마음을 둔 자의 얼굴일 것이다. 몹시 SF적인 아름다움을 그 얼굴에서 본다.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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