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굿바이, 트럼프

박영환 국제부장 2021. 1. 18.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4년 전이다. 도널드 트럼프 제45대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던 2017년 1월20일 워싱턴에는 새벽부터 겨울비가 내렸다. 아침 7시쯤 워싱턴 외곽에서 지하철을 타고 취임식이 열리는 연방의회 의사당 광장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은 ‘미국을 위대하게’라고 새긴 빨간 모자를 쓴 인파가 넘쳐났다. 전국에서 모여든 트럼프 지지자들은 들뜬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오전 10시쯤 의회 광장에서 뒤를 돌아보니 내셔널몰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취임식장에서 만난 이탈리아계 미국인 빌 디오데스는 “트럼프는 고액 기부자들만 만나고 큰 도시만 생각하는 힐러리와 다르다. 그는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트럼프는 훌륭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영환 국제부장

지지자들 사이에 섞여 트럼프의 취임 연설을 들으면서 나는 희망이 아니라 한기를 느꼈다. 비닐 비옷 사이로 겨울비가 스며든 데다 섬뜩한 백인 민족주의 비전까지 듣자니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트럼프는 미국 서민들의 삶이 피폐해진 원인을 외국, 이민자, 기득권에서 찾았다. 대학살(carnage), 약탈(ravage)이란 극단적인 단어로 미국의 현실을 묘사하고, 워싱턴 정치인 같은 기득권은 서민의 적이라며 노골적인 편가르기를 하는 대통령이 낯설었다. 그는 ‘미국 우선주의’를 통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세계화의 파도에 휩쓸려 소외된 백인 노동자, 농민들을 향한 우파 포퓰리스트의 위험한 선동처럼 들렸다.

불안은 현실이 됐다. 중국에 대한 ‘폭탄 관세’ 같은 화려한 쇼가 이어졌지만 미국 노동자들의 삶이 개선됐다는 평가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미국 사회는 극단적 분열 속에 퇴행했고, 국제 무대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됐다. 트럼프가 집권하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창문 밖으로 던져질 것”이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예언은 적중했다.

취임식 관람 인파가 역대 최다였다는 트럼프의 거짓말을 변호하기 위해 참모들이 ‘대안 사실’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 낼 때 퇴행은 이미 예고됐다. 트럼프의 트위터가 백악관 브리핑을 대체했고, 언론의 비판은 가짜뉴스라며 무시됐다. 대통령의 딸과 사위가 실세 역할을 하고, 대통령은 국민 세금으로 자신의 골프장과 리조트에 이익을 안겼다. 미국 정치는 중립지대 없이 친트럼프 대 반트럼프로 양분됐다. 트럼프는 이민을 막으려고 400여개 제도를 도입했고, 백인우월주의까지 두둔했다. 공화당은 권력을 위해 사탄과 거래한 파우스트처럼 비굴하게 트럼프에게 끌려다녔다. 급기야 대통령이 대선 결과를 부정하고, 그의 지지자들이 연방의회 의사당을 침탈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트럼프는 파리 기후변화협약 등 각종 국제협약과 세계보건기구 같은 국제기구에서 탈퇴했고, 전통적 동맹국들을 무시했다.

역사적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됐을 때 트럼프에게 딱 한 번 기대를 걸어보긴 했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북핵 문제를 푸는 데는 실무자 간 협상보다 정상 간 담판이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최고 지도자의 결단이 정책 방향을 좌우하는 독재 국가와의 협상에서는 트럼프의 방식이 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한반도 평화는 지지자들에게 생색을 내기 위한 장식품에 불과했다.

다행히 트럼프의 시간이 곧 끝난다. 4년 만에 트럼프 지지표는 600만표나 늘었지만, 더 이상 그가 미국 사회를 망치게 놔둘 수 없다며 나선 시민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굿바이, 트럼프’가 반가운 건 트럼프의 거짓말, 억지, 궤변을 더 이상 전하지 않아도 되는 기자만이 아니다. 리더의 역할은 뒷전이고 동네깡패처럼 근육자랑만 하는 초강대국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 각국들도 트럼프의 퇴장은 환영할 일이다. 한국 정부도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400% 인상 같은 황당한 협상 조건에 놀랄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조 바이든 당선자가 20일 제46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바이든은 지난 4년간 엉망진창이 된 미국 사회를 재정비하는 어려운 숙제를 떠안았다. 미국의 한 시사평론가는 “바이든은 혼돈을 들여다보고, 통합에 대한 핏빛 대안을 목격한 나라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평했다. 게다가 트럼프식 포퓰리즘, ‘트럼피즘’은 바이든 정부를 끊임없이 흔들 것이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하원에서 두 번 탄핵을 당하고도 트럼프는 4년 후 부활을 꿈꾸고 있다. 바이든은 포퓰리즘이 뿌리내릴 수 없도록 미국 사회의 균열을 치료하고, 세계는 더 이상 ‘트럼프는’으로 시작하는 뉴스를 접하지 않게 되기를 기대한다.

박영환 국제부장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