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하얀 성(城)
[경향신문]
저 성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말 걸어볼 사람이 없고 진열장에 든 빵을 살 수 없는 곳, 쌓인 눈을 만질 수도 없고 멀리 마주본 두 성의 불빛만 거울 같은 곳, 창 너머 희끗한 하인도 은둔자 같군요. 사계의 성을 숭상하는. 집시들의 노랫소리가 풍문처럼 울려퍼지고 밤새 젖지 않는 신발로 어디든 갈 수 있군요. 암벽 같은 성문이 밤을 갈랐다. 오래 묵은 입술로 하인이 말했다. 어서 오세요, 방마다 이야기가 잠겨 있고 귀가 늘어나는 곳으로, 돌아갈 때는 저 반대편 성으로 나올 거예요. 불확실한 어투처럼 떠도는 입자들 어두운 간격을 몬존히 스미는 눈,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성으로 걸어들어갔다. 강신애(1961~)
낯선 여행지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불현듯 이정표를 만난다. 하지만 길이 여러 갈래라 어디로 가야 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없다. 내가 정한 길에 따라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시의 느낌이 그러하다. “저 성의 주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저 성(城)이 무엇이냐이다. 성을 어찌 파악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호성이 이 시를 많이 생각하게 하고, 상상과 사유의 진폭을 크게 만든다.
그렇다면 저 성은 과연 무엇일까. “진열장에 든 빵을 살 수”도 없고, “쌓인 눈을 만질 수도 없”으므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축소판 성이나 사진 같기도 하다. 하인이나 “집시들의 노랫소리”로 보아 동서양의 관문인 터키를 배경으로 한 오르한 파묵의 소설 ‘하얀 성’이 떠오르기도 한다. 또 실재하는 성이나 자아일 수도 있고, “마주본 두 성”은 이승과 저승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먼저 떠난 사람을 따라가고 싶을 만큼 그리워하는 듯도 하다. 어찌 됐든, 나는 앞에 놓인 “성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간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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