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흰 눈과 김치찌개

입력 2021. 1. 1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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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눈 내린 날, 대학생 딸 손에 끌려 슈퍼로 향했다.

오래 전부터 아빠표 김치찌개를 배우겠다며 졸랐는데 오늘 드디어 거사를 치르기로 한 것이다.

"엄마, 엄마, 아빠 김치찌개에 뭘 많이 넣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냐. 그냥 멸치육수에 김칫국물, 액젓 정도면 충분하대." 가족이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웃는 힘은 강하다.

전염병 창궐에도 다행히 가족은 무사하고 딸은 자기가 생전 처음 만든 김치찌개라며 식구들에게 자랑하기 바쁘고 창밖에는 눈이 펑펑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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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큰눈 내린 날, 대학생 딸 손에 끌려 슈퍼로 향했다. 오래 전부터 아빠표 김치찌개를 배우겠다며 졸랐는데 오늘 드디어 거사를 치르기로 한 것이다. 기껏 1~3㎝ 정도라던 강설량은 예고를 훌쩍 넘기고도 기세가 여전하다. 10㎝ 이상은 쌓여야 잦아들 모양이다. 딸은 김치찌개에 어울리는 날씨라며 좋아한다. 못이기는 척 끌려 나오긴 했지만 사실 얼큰한 김치찌개에 소주 한 잔이 그립던 차였다. "아빠, 딸이 데이트해 주는 거 고마운 줄 알아. 어느 집 딸이 이렇게 착해?" 딸은 멀지 않은 거리 내내 수다를 떨었다.

결혼 후 당연하다는 듯 여성이 부엌으로 내몰리는 관습도 마음에 들지 않고 부엌살림을 경제발전의 보조도구쯤으로 여기는 사회풍토도 마땅치 않아, 내 딸만큼은 그런 식의 편견, 불평등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요리가 좋다고 유튜브를 뒤져가며 이것저것 만들어내곤 한다. 하고 싶다는데 취미까지 뭐랄 수는 없지 않은가. 슈퍼에서 사온 것은 돼지 뒷다리살이다. 대부분 삼겹살, 목살을 찾는 탓에 가격이 앞다리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가난한 시절의 습관이기도 하지만 소문과 달리 맛도 썩 괜찮다. 그래서 제육볶음, 탕수육을 할 때도 늘 뒷다리살을 쓴다.

"왼손을 그렇게 하면 손 베이기 딱 좋다. 당근을 말아 쥐듯이 모양을 만들고 칼을 바짝 대는 게 좋아. 그래야 칼질 할 때 힘도 덜 들고 다칠 염려도 없다." 이제 막 요리에 눈을 뜬 터라 아직은 가르칠 일도, 잔소리 할 일도 산더미다. "그냥 물이나 쌀뜨물을 써도 되지만 아빠는 멸치육수를 낸다. 아빠 맛의 비밀이야. 쌀뜨물은 받아두었다가 나중에 국물이 졸면 그때 쓰면 돼." "뒷다리살은 비게 부위를 더 넣고 조금 더 얇게 써는 게 좋다. 아무래도 다른 부위보다 퍽퍽하니까." "고춧가루 한 스푼 정도 넣으면 맛도 칼칼하지만 색이 좋아진다." 등등. 아내가 MSG를 싫어하는 탓에 우리 집 음식은 손과 고민이 더 가는 편이다. "엄마, 엄마, 아빠 김치찌개에 뭘 많이 넣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냐. 그냥 멸치육수에 김칫국물, 액젓 정도면 충분하대." 가족이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웃는 힘은 강하다.

사사로운 일상을 세세하게 적은 이유는, 올해는 거창한 담론이나 정치인, 엘리트들의 막말, 혐오발언보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다는 바람에서다. 웰빙, 힐링, 소확행 같이 겉만 번드르르한 말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만 잘 먹고 잘 살기엔 세상의 어두운 구석은 더 어두워지고 소소하면서도 확실한 행복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동이 더 필요한 시대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2020년은 팬데믹으로, 국내 정치 문제로, 즐거운 일보다 슬프고 화나는 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올해는 조금 더 크게 웃으면 좋겠다. 이기적으로 보일지라도 이따금 세상사에서 물러 나와 자신과 가족을 위해 힘을 쓰면 좋겠다. 걸음을 늦추어 뒤를 돌아보라고, 무거운 짐은 자기한테 떠넘기라고 소띠 해가 아니겠는가.

전염병 창궐에도 다행히 가족은 무사하고 딸은 자기가 생전 처음 만든 김치찌개라며 식구들에게 자랑하기 바쁘고 창밖에는 눈이 펑펑 내린다. 조금은 더 행복해도 된다고 흰 눈이 소복소복(小福小福) 쌓인다.

조영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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