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논농사는 중국 밭농사 기술 독창적으로 융합해 발달했죠"

강성만 2021. 1. 1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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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조선경제사 전문가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는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고유명사나 전문용어를 우리말과 한문으로 칠판에 적어가며 설명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한·중·일 비교 통사-역사상의 재정립이 필요한 때>(너머북스).

14세기부터 19세기 전반까지 동아시아 전통사회를 ‘소농사회’라는 개념으로 파악해온 미야지마 히로시(71)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최근 낸 책이다. 그가 1994년부터 제기해온 ‘소농사회론’을 보다 체계화하기 위해 동아시아 소농사회 성립에 따른 정치적 변혁의 문제, 소농사회 성립의 기초가 된 집약적 농업의 성립 과정 등을 다뤘다. 소농사회는 토지를 소유 혹은 임대해 자신과 그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농업경영을 하는 소농이 지배적인 농업사회를 말한다.

그는 17~18세기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는 세계 다른 지역과 견줘 소농이 압도적인 사회였다면서 이 시기를 서구의 역사 구분 개념인 봉건제나 중세로 파악하는 것은 유럽 중심주의적 사고라고 논박해왔다.

<한중일 비교통사> 표지.

“동아시아는 소농이 중심이 된 집약적인 농업으로 같은 농토에서 유럽보다 10배 이상 생산했어요. 유럽은 씨앗 하나를 뿌리면 다섯배, 동아시아는 20~100배를 거뒀죠. 유럽은 아주 가난한 농업이었어요. 유럽은 토지에 추가 노동력을 투입해도 생산성은 더 떨어지는데 동아시아는 노동력을 많이 투입하면 생산을 더 했죠. 이를 고려하지 않고 유럽에 견줘 동아시아가 후진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월등한 농업생산성과 방대한 인구, 강고한 국가적 결합 그리고 출판으로 상징되는 문화자원의 생산·유통으로 동아시아 소농사회는 서구 여러 나라보다 비교우위에 있었다는 게 미야지마 교수의 지적이다. 13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저자를 만났다.

일본 오사카에서 난 미야지마 교수는 교토대에서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로 학위를 받고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를 거쳐 2002년에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로 옮겨 12년 동안 연구와 강의를 했다. 2014년 퇴직 뒤에도 한국에 살며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소농사회론은 농업이나 농정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 문화 등 사회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개념입니다. 이번 책은 소농사회의 정치구조와 동아시아 전근대 국가가 토지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주로 살폈어요. 지금은 신분제와 사회구조 문제를 작업하고 있죠. 이 내용까지 해서 올해 안에 일본어로 <동아시아 소농사회론>을 낼까 합니다.”

그는 책에서 집약적 벼농사가 동아시아에서 이뤄진 과정을 상세히 고찰했다. 집약적 벼농사로 가족 단위 농업이 발달하면서 사대부(중국)나 양반(한국), 사무라이(일본) 같은 동아시아 지배층이 농업에서 분리됐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한국은 집약적 논농사가 중국과 일본에 견주면 조금 약했어요. 한국의 특수한 사정 때문이죠. 중국은 명나라(1368~1644) 때 강남 델타(강 하구에 발달한 퇴적 지형 삼각주) 치수가 정비됐고 일본도 강 하류 델타에서 집약적인 논농사를 했어요. 반면 한국은 한강이나 대동강, 금강 델타에서 논농사가 이뤄지지 않았어요. 서해 쪽 간만의 차가 10m까지 워낙 컸기 때문이죠. 대신 16세기 이후로 서해 갯벌을 간척했어요.”

그는 “조선 초만 해도 밭농사 위주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논농사 비중이 커졌다”면서 여기에는 농업 기술의 변혁이 크게 작용했다고도 했다. “세종 때 관찬 농서인 <농사직설>에는 논농사에 중국 화북 지역의 밭농사 기술을 활용했다는 내용이 나와요. 일본에 견줘 장마가 늦은 한국은 모내기 때 물이 부족해 논농사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땅을 깊이 갈지 않고 호미 같은 농구로 땅을 눌러서 땅속 수분의 증발을 막아 볍씨에 물을 공급했어요. 중국 화북 건조지대에서 밭농사에 쓴 보수(保水) 기술을 벼농사에 독창적으로 융합했죠. 집약적 농업 성립 과정에서 보인 한국 만의 특징입니다. 학자들이 이전에는 잘 보지 못했던 점이죠.” 미야지마 교수는 호미는 보수와 제초 기능을 함께 가진 한국의 독창적인 농구라고도 했다. “중국 호미는 한국과 달리 손잡이가 길어요. 제 생각엔 고려 말부터 한국에서 호미가 사용된 것 같아요.”

그는 책에서 중국 남송 시대에 주희(1130~1200)가 집대성한 주자학이 소농사회 형성에 끼친 영향도 깊게 다뤘다. “주자학의 핵심은 유학을 배운 사람이 과거를 봐 관료가 돼서 국가를 통치한다는 겁니다. 관료가 되면 출신지를 떠나 서울로 가야 하죠.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그 지위가 후손에게 이어지지 않고 후손은 다시 과거를 봐야 했어요. 이 시스템은 농민들이 자체적으로 농사를 짓는 소농사회가 성립돼 가능했어요. 양반이 농사까지 책임졌다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송나라(960~1279) 사대부나 조선 전기 양반, 도쿠가와 막부(1600~1868) 이전 일본 무사들은 농사를 직접 했지만 소농사회가 형성되면서 농사에서 손을 뗐어요. 소농사회 성립 이전 양반이었던 퇴계는 아들한테 보내는 편지에서 농사 기술을 자세히 조언합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양반인 정약용은 아들한테 주로 공부 이야기만 해요.”

그가 보기에 주희의 출현은 “동아시아 세계의 세계사적 사건”이다. 왜? “주희는 출신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학교에 가서 배우고 성적이 좋으면 그 사람이 정치하는 세상을 꿈꿨어요. 물론 이런 이상이 현실에서 실현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주희는 목표를 높이 뒀죠. 서구 민주주의도 목표는 높지만 실현은 어렵잖아요. 성격은 다르지만 이상적 사회를 꿈꾼 것은 주희나 현대 민주주의 모두 같아요. 한국에서 많은 주자학자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도 비슷한 이치죠.” 주자학의 부정적 영향도 지적했다. “동아시아 지식인은 유럽 지식인과 견줘 실용주의가 약해요. 관념적 성격이 강하죠.”

그가 일본 학계에 소농사회론을 제기한 지 올해로 27년이다. 일본 학계는 지금 그의 가설을 어느 정도 지지할까. “일본사 연구자들한테는 그다지 지지를 받는 것 같지 않아요. 다만 일본의 베트남사 연구자들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북부 베트남 지역도 일찍 델타를 개발해 동아시아 소농사회와 같이 됐다는 제 견해를 16~18세기 베트남사 연구자들이 많이 인용하더군요. 그 분야에선 제 연구가 주류이죠.”

1994년부터 ‘동아시아 소농사회’ 제기 “17~18세기 가족농업 경영 압도적” 최근 집약농업 성립 과정 등 책으로

“서구모델로는 한국사 매력 알 수 없어 한·일 학자들 자국 비판부터 해야” 2004년 퇴임하고도 한국에서 연구

그의 견해라면 18세기까지 앞선 동아시아는 19세기 서구의 무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유럽은 농업 생산이 많지 않아 일찍 바깥으로 눈을 돌렸어요. 반면 동아시아는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어요. 집약적 농업으로 토지에 투자해 생산을 많이 했으니까요. 일찍 바깥으로 나간 서구는 무기가 발달했어요. 16세기만 해도 유럽과 동아시아 군사기술이 거의 차이가 없었는데 300년이 지나 서구 군사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죠.” 그는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던 동아시아는 세계에 대한 안목 부족으로 국가가 당면한 진짜 문제가 뭔지, 파악하는 것도 어려웠다”고 했다. “핵심적인 거는 바꿀 필요가 없다면서 ‘중체서용’이니 ‘동도서기’니 하면서 군사기술만 바꾸려고 했죠. 하지만 그 시점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가 한국사 공부를 시작한 게 교토대 동양사학 전공 4학년이던 1970년이니 올해로 51년이다. 지난 한국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꼽아달라고 하자 그는 한국사 전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서 잠시 침묵하다 이렇게 말했다. “자료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조선사 연구자인 저한테는 87년 서울대 규장각에서 조선시대 토지대장인 양안을 처음 본 순간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숫자만 나열돼 있고 무미건조한 자료인데 시기마다 지역마다 양안이 조금씩 다르더군요. 그때 이게 왜 다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관심이 생겼죠. 이 차이를 이해하면 역사 연구자로서 보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제 역사 연구 인생에 전환점이었죠.” 양안은 그에게 소농사회론 정립에 대한 자신감도 심어주었단다. “중국의 ‘어린도책’이나 일본의 ‘검지장’이 한국의 양안이죠. 당시는 이 세 장부에 대해 비교연구 하나 없었어요. 결부(한국)나 석고(일본), 세무(중국)는 면적과 비옥도를 결합해 토지에서 1년에 얼마나 생산하는지 보여주는 단위입니다. 세 나라 모두 같은 방식을 썼어요. 세 장부가 영향 관계가 없는데도 우연히 같은 방법으로 국가가 토지를 파악했죠.”

“한·일 역사학계, 업적주의 탓에 큰 이야기 없고 개별적 문제만 다뤄” “불안과 희망 속 인간 삶, 보려 했다”

한국사 연구 공간을 한국으로 옮긴 게 공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어디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젊은 연구자들과 많이 연구하고 새로운 연구가 나올 수 있도록 서로 토론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성과이죠. 조선시대 연구는 한국사 중에서도 핵심이니까요.” 그리고 덧붙였다. “한국에 와서 조선사 연구가 근본적으로 잘못 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죠. 조선사 연구자들은 양안 자료를 보면서 토지소유가 어떻게 분화했고, 지주제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주로 그런 쪽에 관심을 보이더군요. 저는 국가가 왜 양안 자료를 만들었고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실제 양안 정보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았어요. 당시 거의 모든 토지를 파악한 국가가 의도를 가지고 현실을 가공했어요. 예컨대 토지 면적을 실제보다 작게 기록했죠. 세금을 내는 농민들을 고려해서겠죠. 양안 자료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조선사 연구자들은 서구의 역사 발전 모델로만 조선시대를 파악하려고 해요. 이렇게 하면 조선 시대의 장·단점을 제대로 볼 수 없어요. 한국사 연구의 매력도 제대로 알 수 없죠.”

그는 책 서문에 ‘코로나 19’ ‘기후 위기’를 맞아 역사학의 존재 의의가 근본부터 의문시되고 있다고 적었다. 위기에 역사가 더 필요한 것 아니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받았다. “미래는 더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어요. 미래가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역사학도 존재하는 것 아닐까요. 요즘 들어선 역사학이 어떤 메시지를 내야 하는지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는 생각도 해요. 적어도 우리 세대는, 다음 세대는 우리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왔는데 지금 젊은 세대는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아요. 젊은 학생들에게 역사 교수로서 뭔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답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동안 인간이 뭘 잘못했고 어떻게 위기를 맞게 됐는지를 가르쳐야 할까요.”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 표지.

그는 한국사를 전공한 이유를 두고 “동양사 분야에서 가장 차별과 관계 깊어서”라고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너머북스, 2013)에서 회고했다. 교토대 학부 시절에는 일본 사회에서 오랫동안 차별받아온 ‘부락민’ 문제를 연구하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단다.

미야지마 교수는 사관이 뭐냐는 질문에 역사가로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일본 역사학자 나카이 노부히코의 책 <역사적 방법의 기준>에 나오는 내용을 들려 주었다. “나카이는 이렇게 썼죠. ‘인간이 산다는 것은 상당히 불안하다. 그래서 불안을 극복하려고 집단을 만들지만 집단 속 삶도 여러 가지로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또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희망이 있다. 이런 희망은 어떤 희생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불안과 희망을 가지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밝히는 게 인간의 역사다. 모든 희망은 아름다우며 또 역사적 규정력을 가진다.’ 저도 역사 연구에서 인간이 불안과 희망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려고 했죠. 인간은 시대 상황의 구속을 받아 희생도 당했고 희망도 있었죠. 역사적 규정력을 받으면서요. 지금이야말로 인간이 불안과 희망 속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그는 “역사학에서 객관성이란 개인의 사적인 경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개인적 경험은 반드시 사회적 규정을 받아요. 그 시대의 사회적 제약을 받죠. 저도 대학 다닐 때 한국과 한국인, 한국사에 대해 (일본인들이) 부정적으로 보는 현상에 대해 관심도 갖고 분노도 하면서 한국사를 택했어요. 개인적 동기에서 (역사 연구를) 시작한 거죠.”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가 사진을 찍으며 웃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한국과 일본 학계를 각각 20년 이상 들여다 본 연구자로서 두 나라 학계를 비교해달라고 하자 그는 “한국에서 학계 활동을 활발히 하지 않아 답할 처지가 아니다”며 즉답을 피한 뒤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역사학 연구가 개별적 문제만 다루고 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아요. 업적주의 탓이죠. 요즘은 프로젝트 연구가 중심이잖아요. 1, 2년 안에 성과가 나와야 연구비가 나오니 10년 정도 해야 하는 좋은 연구 논문이 나오기 힘들어요. 아주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좋은 평가를 받죠. 숙성할 때까지 지켜보지 않아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질문은 ‘한-일 관계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느냐’이다. “역사 연구의 중요한 효과는 현실 비판입니다. 한국인 연구자는 한국에 대해 비판하고, 일본인 연구자는 일본에 대해 비판해야죠. 그런데 이게 둘 다 약해지는 것 같아요. 상대방은 비판하면서 자기에 대한 비판은 약해지는 거죠. 일본 사회 전체가 보수화하고 현실을 긍정하는 분위기 탓도 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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