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유기농 잔혹사..매출 100억 '장안농장' 파산 미스터리 [스페셜 리포트]

정혁훈 2021. 1. 17.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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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ECIAL REPORT : 유기농 산업 왜 시들한가 ◆

류근모 장안농장 회장(61)과 아들 류병찬 씨(31)가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쌈 채소를 돌보고 있다. 류 회장은 그의 8대조 할아버지가 철종 때 집필한 과채재배법에 따라 생태순환농법으로 유기농을 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
충북 충주에 위치한 장안농장. 쌈채소를 주로 공급하는 이 농장은 한국 유기농의 대표 브랜드다. 2009년 처음으로 매출 100억원을 돌파한 이후 2018년까지 100억원대 매출을 유지했다. 소농(小農) 위주인 한국 농업계에서 일반 관행농업이 아닌 유기농업으로 농부가 매출 100억원대를 기록한 건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11년 전인 2010년 매일경제가 '첨단농업 부국의 길'을 주제로 개최한 국민보고대회 '아그리젠토 코리아'에도 장안농장이 등장했다. 한국 농업에도 성공의 싹이 트고 있다는 근거로 햇사레 복숭아와 함께 장안농장이 제시됐다.

이 농장을 운영하는 류근모 회장(61)은 장안농장 성공을 발판으로 농민으로는 드물게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한국 농업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대산농촌문화상'(상금 5000만원)도 일찌감치 받았다. 류 회장은 그야말로 스타 농부이자 혁신가로 통한다.

소와 닭 분변으로 만든 최비는 발효를 거치면서 냄새가 사라지고 영양분만 남는다
그런데 작년 3월 장안농장이 갑자기 파산선고를 받았다. 100명까지 늘었던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농장 랜드마크인 첨단 물류센터는 가동을 멈췄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생태순환농법으로 유기농 중심지를 건설하려던 류 회장의 꿈도 꺾였다. 동시에 한국 유기농 산업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앞으로 한국에선 더 이상 장안농장과 같은 곳이 나타나기는 어렵다는 절망감이 농업계에 퍼지고 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단위면적당 농약 투입량이 압도적 1위다. 프랑스의 4배가 넘는다. 그럼에도 한국 유기농 시장은 시들하다. 소비자들은 분명 농약 친 농산물을 싫어한다고 하는데 애써 유기농산물을 찾지는 않는다. 장안농장이 파산으로 이르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이유가 보인다. 장안농장 안으로 들어가보자.


가축 분변으로 만든 퇴비가 채소엔 보약

강추위가 한풀 꺾였던 지난 13일 장안농장을 찾았다. 농업회사법인 장안농장 파산으로 전국 170개 협업농가에서 올라온 유기농산물을 분류하고 포장하던 첨단물류센터 입구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그러나 류 회장은 여전히 임차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땅 소유권은 잃었지만 그렇다고 맨땅을 놀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쌈채소 농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기자를 제일 먼저 맞이한 건 닭이었다. 마침 닭들의 식사 시간. 류 회장이 박수를 치면서 "얘들아 이리 와라" 하고 소리치자 닭들이 저 멀리 사육장에서 달려나온다. 류 회장은 농장에 딸린 '열명의 농부'라는 채식 뷔페 식당에서 나온 쌈채소 잔반과 유기농 콩비지를 농장 한쪽에 흩뿌렸다. 닭들의 자유로운 오찬은 한참 동안이나 느긋하게 이어졌다. 닭 팔자가 상팔자였다.

닭장 옆 외양간에선 소 대여섯 마리가 '음매' 울고 있다. 류 회장 발자국 소리에 눈치를 챈 듯 왕방울만 한 눈이 애처롭게 밖을 쳐다본다. 쌀겨를 뿌려주자 황소와 얼룩소가 서로 경쟁하듯 먹어치운다.

닭장과 외양간 바닥엔 참나무로 만든 목재 조각(우드칩)이 깔려 있다. 가축들에겐 뽀송뽀송한 카펫 같은 역할을 한다. 닭과 소가 바닥에 분변을 싸면 우드칩과 섞인다. 일정 시간마다 이 우드칩을 밖으로 꺼내 쌀겨, 깻묵 등과 섞어 메주를 띄우듯이 퇴비를 만든다. 발효 과정이다. 대략 6개월 정도 걸린다. 이 퇴비가 장안농장의 핵심 경쟁력이다. 채소를 심기 전에 밭에 퇴비를 뿌려 지력을 높이는 것이다. 그래야 채소가 병충해에 강해진다. 농약을 안 쓰고도 채소를 기를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류 회장은 "퇴비를 만드느라 직접 소와 닭을 키우다 보니 농한기인 겨울에도 단 하루도 쉬지 못하지만 생태순환농법을 실천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철종 이후 10대째 이어지는 전통 농법

생태순환농법은 유기농으로 재배한 채소를 유기농 가축에게 먹이고, 이 가축 배설물로 유기농 퇴비를 만들고, 이를 다시 유기농 채소 생산에 투입하는 방식이다. 유기농에서도 최고 경지로 통한다. 그러나 농부의 몸이 너무 고달프다. 비용도 훨씬 많이 든다. 그럼에도 그가 생태순환농법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조상 대대로 일군 농사법이기 때문이다.

장안농장에 있는 국내 유일한 채소박물관에는 고문서가 하나 비치돼 있다. 조선 철종 때인 1851년 3월에 발간된 '과채재배법'이라는 책자다. 류 회장의 8대조 할아버지(류재근)가 직접 저술한 책으로 과일과 채소에 대한 유기농 재배법을 소개하고 있다. 류 회장이 9대째, 그의 아들 류병찬 씨(31)가 10대째 과채재배법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장안농장의 성공이 이 과채재배법 때문만은 아니다. 농산물은 품질이 아무리 좋아도 판로가 없으면 금세 쓰레기가 된다. 그의 성공은 농부가 생산만 해선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그의 철학이 바탕이 됐다. 그는 가공과 판매도 농부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수백 ㎞를 운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거래처를 개척했다.

처음에는 쌈채소 식당을, 그다음에는 대형 할인점을 뚫었다. 아이디어도 비상했다. 온라인 쇼핑 개념이 등장하기도 전인 1998년 상추를 우체국 소포로 보냈다. 주변에서 누가 상추를 소포로 사겠느냐며 뜯어말렸지만 그는 소비의 큰 흐름을 읽는 눈이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책을 1만권 이상 읽은 것이 가장 큰 자산이었다.

류 회장이 성장에 날개를 단 것은 2001년 대형 할인점과 직거래를 시작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공급 물량이 늘어나자 물류센터를 짓고 협업농가를 규합해 규모를 키웠다. 협업농가들엔 생태순환농법을 전수했다. ISO 9001 인증도 받았다. 모든 것이 국내 최초였다. 이런 성과들이 모여 2009년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고, 이후 10년간 장안농장은 농업계 성공 신화였다.


인건비 급등·유기농 불신이 부른 참극

장안농장 첨단물류센터 입구가 자물쇠로 봉쇄돼 있다.
장안농장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건 2015년 무렵이었다. 당시 돌풍을 일으키던 한 온라인 쇼핑업체에서 투자를 받아 물류센터 규모를 키우고 설비를 교체한 게 화근이었다. 해당 업체는 약속된 물량을 가져가지 않다가 결국 계약 자체를 해지하고 말았다. 수도권에서 거리가 멀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도 당장 농장이 어려워질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인건비가 생각 이상으로 급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협업농가에 줄 납품대금과 할인점 판매 가격은 그대로인데 매장 판매사원과 농장 직원 등 인건비가 빠르게 오르다 보니 수지를 맞추기 점점 어려워졌다. 류 회장은 "처음 대형 할인점에 판매사원을 내보냈을 때에 비해 급여가 2배 이상 올랐는데 유기농 채소 판매가격은 10~20% 정도밖에 안 오르다 보니 너무 힘이 들었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유기농은 일반 관행농에 비해 생산비가 최소 50% 이상 더 들어가기 때문에 농장으로서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꼴이다.

때마침 유기농에 대한 소비자들 인식까지 나빠졌다. 유기농에서 농약이 검출돼 소비자들을 실망시킨 몇 차례 사건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살충제 계란 파동이었다. 일반 계란에서 농약이 검출된 데 이어 유기농 산란계 농장에서도 DDT라는 살충제가 검출되자 소비자들이 유기농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의 유기농에 대한 불신은 장안농장 판매에도 영향이 있었다. 비용 부담이 급증하는데 판매까지 악화되자 경영 수지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 초 농장이 부도를 냈다는 잘못된 소문까지 돌면서 은행의 부채 상환 요구가 일시에 몰렸다. 장안농장을 믿고 따랐던 협업농가들도 납품 중단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피해가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한 방법은 파산선고뿐이었다. 장안농장 성공 신화는 23년 만에 그렇게 막을 내렸다.


소비자 오해 부르는 유기농 인증제

류근모 회장(왼쪽)과 아들이 구독서비스로 보내질 계란과 쌈 채소를 배달 상자에 담고 있다.
물류센터 확장이 실패로 돌아간 건 장안농장만의 문제일 수 있지만 나머지 요인들은 국내 유기농 농가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문제다. 그중에서도 유기농에 대한 소비자들 인식이 좋지 않은 건 참으로 역설적이다. 먹거리 안전에 관심이 많은 한국 소비자들이 왜 유기농에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한 것일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유기농 인증 제도가 소비자 불신을 부추기는 최대 원인이라고 지목한다. 유기농 인증 방법으로 '과정주의'를 선택하고 있는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결과주의'를 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유기농 인증 여부를 판단할 때 생산물에 대한 잔류농약 검사 결과를 기준으로 한다. 농약이 단 0.001%만 검출돼도 유기농 인증에서 탈락한다. 20년간 유기농을 했던 농장이라도 단 한 번 잔류농약 검사에서 농약 성분이 검출되면 바로 퇴출이다. 이와 달리 유럽과 미국은 잔류농약이 검출돼도 기준치 이하면 사실상 무시한다. 오히려 잔류농약이 검출된 원인을 찾아 해결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한다. 얼핏 보면 우리나라 방식이 더 철저하기 때문에 좋은 것 같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잔류농약이 검출된 유기농 농장 대부분은 몰래 농약을 뿌린 게 아니라 인근 농장에서 농약이 비산돼 날아오거나 아니면 원래부터 그 토양에 농약 성분이 남아 있던 곳이라는 점이다. 수년 혹은 수십 년간 유기농을 일군 노력이 한순간에 억울하게 물거품이 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 때문에 경제성을 따지는 합리적 농가에서는 리스크를 떠안으면서까지 굳이 유기농을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친환경 농업을 연구하는 이시도르지속가능연구소의 유병덕 소장은 "대개 유기농 농장에서 비산 농약이 검출된다 해도 그 농도는 일반 관행농에 비하면 극히 미미하다"며 "그런 유기농산물이라고 하더라도 일반 농산물에 비해서는 건강에 훨씬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유기농을 멀리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고 꼬집었다. 유 소장은 "선진국들이 농약 검출 농도라는 결과보다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것은 바로 소비자 편익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가 검출된 농약 농도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사실 소비자 편익보다는 행정 편의주의적인 발상이라는 것이다.

다행히도 정부는 작년 8월 친환경농업법 개정 발효를 통해 친환경 농업의 정의를 생산·결과 중심의 안전한 농산물 개념에서 실천·과정 중심의 건강한 생태계 유지로 수정했다. 따라서 농산물품질관리원이 담당하는 친환경 인증 제도 역시 소비자 편익을 중시하는 쪽으로 합리적인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안농장을 살리기 위해 나선 사람들

장안농장의 유기농 사업모델이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지만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 장안농장식 생태순환농법을 살리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정신과 의사이자 면역력 전문가인 이시형 박사(87)다. 세로토닌연구소와 강원도 홍천 힐리언스 선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이 박사는 면역력을 높이기 위한 최종적인 수단을 음식으로 보고 있다. 이 박사는 건강에 좋은 유기농 먹거리를 찾아 전국을 돌아본 끝에 충주 장안마을을 발견했다. 퇴비를 직접 생산하는 것에 감동받은 이 박사는 2019년부터 장안농장과 협력을 논의하다가 작년 파산을 계기로 장안농장 사업을 이어받아 새로운 유기농 사업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 박사는 장안농장 사업을 이어받을 주체로 메디올가라는 법인을 설립한 뒤 지인들과 함께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우선 직판장을 곳곳에 설립해 유기 농산물과 가공식품, 음식, 도시락 등을 판매한다는 구상이다. 서민도 저렴한 가격에 마음껏 유기 농산물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 이어 유기 농산물에서 추출한 기능성 물질로 바이오산업을 일구고, 그동안 쌓아올린 예방의학 노하우와 연결하는 사업에도 나선다는 구상이다.

류 회장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유기농 계란과 쌈채소를 정기적으로 배달해주는 구독경제식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농장에서 생산 가능한 물량만큼만 고객을 모집할 계획이다.

이해극 한국유기농업협회장은 "우리나라는 여름엔 고온다습, 겨울엔 저온건조 등 날씨 탓에 병해충이 많은 최악의 조건에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며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농약과 화학비료 없이 유기농업을 하는 농민들은 국민 건강을 지키고 생태계를 보존하는 애국자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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