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걸의 세시반] 인구 감소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한겨레 2021. 1. 1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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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걸의 세시반]

스무살 청년이 ‘이충걸의 세시반’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충걸 ㅣ 에세이스트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을 사랑한다. 농반진반이지만 예수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한 건, 아이들 없는 세상이 너무 건조해서일 것이다. 결국 아이들의 부재는 그들이 엄청난 축복이라는 사실을 극렬히 상기시킨다.

언젠가 미국 시애틀에서 달라이 라마는 말했다. 만명 군중 앞에서였다.

“인구가 너무 넘칩니다. 과잉이죠. 심각해요. 아주 심각해요.”

곧 모순되는 말도 덧붙였다.

“아이들은 희망의 근원입니다. 우리 미래는 그들에게 달려 있으니까요.”

<인구론>을 쓴 토머스 맬서스가 죽은 지 187년 됐으나, 인구가 많아질수록 기근이 심해지고 환경이 파괴된다는 맬서스식 추론은 지금까지도 기세등등하다. 사람들이란 모였다 하면 뭐든 소비할 수밖에 없고, 먹을 것 잘 곳이 부족하면 덩달아 값도 뛸 테니, 통제 불능으로 인구가 늘면 기다린 듯 지옥이 입을 벌리겠지.

그러나 늘어난 인류가 더 큰 재앙을 의미한다는 믿음은, 반대편 사람들에겐 냉큼 반론의 먹이가 되었다. 과거 두세기 동안 인류가 일곱배 늘었다지만 요즘은 옛날보다 더 잘 먹고,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산다. 역사상 인구 감소와 경제적 번영이 동시에 일어났던 적이 있었나? 맬서스는 당시 국가적 재난으로부터 수백만명이 살아남은들 종국엔 아사(餓死)할 거라고 했지만, 예언은 두고두고 틀렸다. 수치로만 보면 인구가 감소하는 그만큼 먹여 살려야 할 입도 줄어드는 셈 아닌가.

바야흐로 인구 통계학의 겨울이 왔다. 오늘의 세계에 가장 불길한 조짐은 떨어지는 출생률과 더욱 위축된 다산(多産) 경향이다. 유럽은 예외 없고, 중국조차 인구 보충 출생률(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필요한 출생률) 아래로 내려갔다. 옛날보다 생존 기간이 길어져 인구는 줄지 않는데, 문제는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 수가 훨씬 줄었다는 것이다. 앞으론 더 심화될 것이다. 그게 가까운 미래에 자녀를 낳을 성인의 수도 줄어든다는 의미라면, 세계의 어린아이들은 약속처럼 서서히 사라져갈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젊은 인구가 계속 축소될 때 노인 인구는 수년 안에 유례없이 팽창할 것이다. 노동 인구와 퇴직 인구는 절대 수치로 명과 암을 가를 테고. 어느 틈에 우리나라는 북유럽처럼 돌이킬 수 없게 나이 들어버렸다.

순진한 낙천주의자들은 이런 현상에 반색할지도 모른다. 노동 인구가 줄면 고용이 늘고, 그 결과로 실업률이 낮은 상태가 유지될 테니 나라 살림이 부쩍 나아지지 않으려나? 하고. 그런데 일본의 경우, 기대와 달랐다. 출생률이 떨어진 몇십년간 일본의 노동 인구는 표 나게 줄었지만 실업률은 외려 늘었다. 불어난 노인 인구는 감당할 재정이 커졌다는 의미가 되었으니, 그 때문에 세금을 더 내야 했던 노동 인구는 일의 양을 줄이는 것으로 반발했다. 모든 세금이 사회보장제도와 국민건강보험에만 쓰인다면 그들이 오히려 의료보험 혜택에서 열외될까, 걱정하면서. 그러나 사태는 뜻밖에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져 긴 침체를 불렀지.

이름난 경제학자가 아니라도 지식, 기술, 경험 같은 인간의 자원만큼 절대적인 가치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구 증가 자체는 인류의 숙제가 아니라 미래가 되었기 때문에. 베이비 붐만 해도 국가마다 기운찬 개척자 역할을 하지 않았나. 그 자원에는 어떤 열망, 법령, 보존, 상상력처럼 근원적이고 비물질적인 요소도 포함된다. (한편, 인구 증가의 다른 구실은, 사람들 많은 데 가면 번잡하다고 불평하면서 혼자 있을 땐 또 외롭다고 투덜대는 당신 때문이다.)

그런데 당장 내 주변에도 마흔 넘도록 미혼인 어른 아이들이 다수이다. 또 다들 촌각을 다투어 비혼 선언을 해대는 통에, 우사인 볼트가 왜 빨리 은퇴했는지 알 것 같다. 출산 동기를 못 찾고 둘이서 잘 살아보자고 맹세한 기혼들도 부지기수. 결혼은 개인의 문화 정체성이나 옵션이 아니라 인류애의 시작이며, 자녀를 만드는 신체적 결합이란 그저 풍성한 은총이라고 외치던 엄숙한 이들은 요즘의 결혼 배후에 휘몰아치는 배신과 계산, 폭력과 학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통계의 황무지를 거닐어봐도 인구분포도 속엔 나의 카테고리가 없다. 요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조금 더 살아도 된다는 거? 모태 안에서 세상은 보드라운 공간일 거라고 착각했던 태아 시절이 어제 같은데, 벌써 가임 연령을 넘겼다니. 그러나 이브 몽탕이 일흔넷에 아들(발랑탱)을 낳은 걸 보면, 육체적으로 절륜한 남자들에게 갖는 거부감이 새삼스럽고도 감탄스럽다. 문제는 발랑탱이 세살 때 몽탕이 죽었다는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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