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맥을 위하여, 발췌번역에 반(反)하여 / 김윤철

한겨레 2021. 1. 1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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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윤철 ㅣ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석사과정생

문맥 없이 무언가를 아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약속 자리에 조금만 늦어도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사람들 말을 알아듣기 힘들다. 진공에서 진행될 것 같은 철학, 과학도 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경제적 맥락을 바탕으로 행해진다. 즉, 문맥은 앎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문맥에 무뎌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티 이후로 역사라는 서사를 느끼는 건 갈수록 힘든 일이 되어간다. 세계화는 국지적 문맥을 희석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멋진 나’ 외의 문맥이 삭제된다. 글을 디지털로 보면 문맥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도 밝혀졌다. 무엇보다, 갈수록 문맥을 따질 여유가 없다. 책도 뉴스도 간추린 콘텐츠를 보는 것이 대세다. 이런 탈문맥화 추세를 대표하는 문화 현상이 ‘짤’이다. 게시물 ‘잘림 방지’에서 시작한 짤은 어느덧 문맥에서 ‘잘려 나온’ 사진이 됐다. 뜬금없을수록 짤은 웃겨진다.

맥락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꺼낸 건 유명 출판사가 원서 ‘발췌번역’ 시리즈를 내고 있다는 걸 발견해서다.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가 왜 인지도가 낮은지 궁금해 번역 현황을 알아봤는데, 단 2개의 번역 중 2009년본이 ‘발췌번역’이었다. 경악했다. 소설을 띄엄띄엄 옮긴 것이 어떻게 번역이란 말인가. 그것은 그림이나 조각품을 잘라서 전시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다. 문학 작품은 무수한 내적·외적 문맥으로 이루어진다. 쉼표 하나의 뜻도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게 문학이다. 발췌번역은 그런 문맥을 없앤다. 유기성을 해치면 생명체가 죽듯 문맥을 해치면 텍스트가 죽는다. 들여다봤다. 줄거리와 원작은 무관하다는 게 문학의 기본 공리인데, 줄거리 요약이 있다. 책장을 넘기면 텍스트 훼손 자국인 말줄임표가 즐비하다. 발췌 기준은 ‘명언’ 만들기다. 이 책은 장(챕터) 앞머리마다 작가의 경구나 고전 인용구를 배치한 <미들마치>의 기본 특징마저 생략한다.

전공생만의 일이 아니다. 서점 사이트에는 엘리엇을 애타게 기다리다 배신감을 느낀 이들의 댓글이 달려 있다. 미래에 있을 한 명의 독자를 위해서라도 출판사는 제대로 출판해야 한다. 이 출판사는 그 의무를 저버렸다. “바쁜 현대인이 발췌, 완역, 원전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변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바쁜 시간을 쪼개 고전을 읽으러 온 독자들이 왜, 언제 그런 단계를 거친단 말인가.

문맥을 살피는 것은 세상을 이루는 요소들의 연결성을 확인하는 일이기에, 그 일에는 나와 세상도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전제된다. 문맥에 대한 무심함이 우리를 서로와의 단절로 이끄는 이유다. 문맥이 사라진 공간은 유아론적 반응으로 채워진다. 낯익은 분노, 낯익은 웃음, 낯익은 감동이 대상의 구체성을 대체하는 건 우리가 나날이 익숙해지는 경험이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나를 뺀 모두를 이해가 불가하고 불필요한 대상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작년에도 우리는 빠른 분노로 부조리 대신 그것을 지적한 이를 벌하고, 빠른 웃음으로 열악한 연예계 환경 대신 연예인을 할퀴고, 빠른 감동으로 코로나 간호진의 목소리를 막았다. 문맥의 예술인 문학이 ‘발췌번역’된 건 그래서 더 징후적이다. 물론 문맥 탈피가 창조성과 전복성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를 둘러싼 최소한의 맥락에 대한 간과는 그 무심함을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돌아오게 하는 일일지 모른다. 그렇게 약해진 서로와의 고리가 역사의 가해자들의 표적이 된다는 걸, 그래서 문맥은 사수의 대상이라는 걸 작년에도 미투 운동이 우리에게 일깨워줬다.

코로나19로 서로가 어느 때보다 멀어진 한 해였다. 문학이 문맥의 보루가 되어 그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혀줄 수 있길 바라며, 영국 시인 존 던을 생각한다. “누구도 그 자체로 오롯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조각이요, 본토의 부분이다.” 1623년 12월, 그가 많이 아픈 뒤 적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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