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노동윤리의 부질없음 / 김만권

한겨레 입력 2021. 1. 17. 16:26 수정 2021. 1. 1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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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김만권 ㅣ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사람들이 들쭉날쭉한 노동습관을 버리고 정교한 기계작업의 일관된 규칙성을 따르도록 가르치는 일은 어렵다. 정교한 기계작업이 능률적으로 이용되려면 지속적인 감독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골 사람들은 하루에 열 시간 넘게 공장에 갇힌 채 기계를 쳐다볼 생각이 없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방적기를 만든 리처드 아크라이트가 한 말이다.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열심히 일할 생각이 없었다. 돌아보면 근대 이전의 세계에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일종의 ‘노예의 도덕’이었다. 먹고산다는 일에 얽매이는 것은 인간답지 못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된 산업혁명은 끊임없이 값싼 대량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당시의 사상가들이 가장 집중했던 작업이, 기계 앞에서 성실하고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 전형적인 예가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이다. 벤담은 ‘공리주의’의 창시자이다. ‘쾌락은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라’는 간단명료한 ‘효용의 원칙’을 앞세워, 고대 세계가 추구했던 ‘미덕’(virtue)과는 단절된, 근대 세계의 새로운 윤리를 전파했다. ‘근대’(modern)가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했을 때, 이를 가장 잘 구현하고 표현했던 사상이 이 ‘효율성의 지배’였다.

이런 벤담이, 효용이 극대화된 사회를 이루어내고, 궁극적으로는 극대화된 효율성이 윤리적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장치’가 있었다. 그것이 푸코가 근대사회의 모델이라 부른 원형감옥, ‘파놉티콘’이다. 파놉티콘의 설계자로서 벤담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20년 넘게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대개 ‘파놉티콘’을 감시가 가장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감옥으로만 알고 있지만, 이곳이 작동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스스로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신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벤담은 ‘효용의 원칙’과 함께 ‘노동가치설’의 신봉자였다. 벤담은 원형감옥에서 일과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일과표는 수감자들에게 노동의 열매를 통해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데 있어 무한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를 위해 벤담이 일과표를 넘어 원형감옥을 규제했던 방식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놀랍다. 무엇보다 벤담은 당시 감옥에서 유행하던 처벌적인 노동에 반대하고 보상이 있는 생산적인 노동을 장려했다. 그리고 노동에서 협력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해 수감자를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독방에 넣는 것에 반대했다. 사소하게는 수감자들이 사식을 먹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는데, 자신의 노동으로 더 나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걸 깨우쳐주기 위해서였다. 벤담은 또한, 감옥이 수감자들에게 노동에 필요한 기초적인 독서, 글쓰기, 산수 등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폐쇄적인 감시탑을 일요일마다 개방적인 종교적 예배당으로 변신시켜 도덕교육의 장이 되도록 했다.

이렇듯 벤담은 파놉티콘이라는 무시무시한 설계를 통해 노동윤리를 만드는 데 일조했지만, 최소한 그 노동력의 소중함은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벤담은 감옥과 수감자의 안전 및 청결을 끊임없이 강조했는데, 그 이유는 건강한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불결하고 위험한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던 당시의 노동현실과는 전혀 다른 발상이었다.

‘노동윤리’는 이렇게 만들어져 지금의 세계로 왔다. 우리는 자라면서 늘 ‘열심히 일하는 자만이 자격이 있다’고 배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뭐라도 열심히 해라’ 그리 배운다. 하지만 지난 8일 통과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보면 이 말은 반만 진실인 듯하다. 수많은 논란 끝에 이 법은 중대재해기업보호법으로 마무리되었다.

해마다 노동자 2400여명이, ‘열심히 일하라’는 노동윤리를 온몸에 새기고 간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한다. 이제 솔직해져야 한다. ‘일하는 자만이 자격이 있다’는 건 부질없는 말이다. 현실에선 ‘일하다가 죽더라도 괜찮은 자만이 자격이 있다.’ 노동자의 목숨이란 가치는 결코 생산비용을 이길 수 없다. 노동윤리가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을 성실 근면한 노동력으로 교화했지만, 불행히도 기업과 국가가 노동을 비용 이상의 것으로 여기도록 교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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