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말고] 무로 돌아간 물방울 화가 / 이나연
[서울 말고]
이나연 ㅣ 제주도립미술관장
“파리 가난한 아틀리에에서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 유화 색채를 떼어내 재활용하기 위해 캔버스 뒤에 물을 뿌려 놓았는데 물이 방울져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존재의 충일감에 온몸을 떨며 물방울을 만났습니다.”
미국과 파리를 오가던 한국의 무명화가 눈에 어느 날 캔버스 뒤에 맺힌 물방울이 눈에 띄었다. 캔버스 뒤에 맺힌 물방울의 인상을 캔버스 앞면에 정교하게 그려 넣었다. 녹색의 단조로운 화면에 하나의 영롱한 물방울과 그 그림자만을 그려 넣은 작품의 제목은 <밤에 일어난 일>. 1972년에 최초 제작된 물방울 시리즈의 기원이 되는 이 작품은 파리의 ‘살롱 드 메’ 초대전에 출품돼 파리지앵의 관심을 받았다. 그로부터 50년에 가까운 기간 김창열 작가는 그 찰나에 발견한 물방울에 천착한다. 한 방울의 물방울부터 수백 개의 물방울까지 김창열이 만든 화면 위에서 반복되고, 확장되고, 줄어들거나, 흘러내렸다.
평면인 화면에 사실적인 묘사를 함으로써 실제 존재하는 듯한 착시효과를 일으키는 트롱프뢰유라는 기법으로 그려진 물방울 자체에는 사실 의미가 없다. 의미 없는 투명함은 관객의 마음속에 투영돼 제각각의 의미를 만들어내게 하거나, 명상에 빠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한국전쟁 시절 어린 친구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걸 본 작가에게 세상은 의미 없음으로 점철됐다. 잠시 생겨났다가 증발되거나 스며들어 사라지는 물방울의 환영에서 작가는 자아소멸과 무아의 경지를 느낀다고 했다. 동료 작가인 이우환은 “김창열의 물방울은 물질과 환상을 겹침으로써 새로운 시각적인 것을 제시했다. 그래서 하나의 오브제도 아니고, 옛날식의 그림도 아닌 묘한, 어중간한 지점을 포착해낸 대단히 새로운 매체현상을 그는 창안해낸 것이다. 물방울 하나는 기쁨도 주고 설움도 주고 어떤 추억이나 기억도 되살려 준다. 그리고 우리는 영롱한 물방울 속에서 또 다른 환상도 본다”고 말한다.
순간에만 존재하지만 캔버스에 붙들린 순간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물방울, 이 물방울을 쉼없이 화면에 붙잡아두던 김창열은 ‘물방울 작가’가 됐다. 김창열과 제주의 인연은 6·25전쟁 시절에 시작된다. 1952년 경찰학교 졸업 후 제주도에 파견된 작가는 제주에 1년6개월가량 머물렀다.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흐른 2014년, 김창열 화백은 직접 시대별 주요 작품을 선별해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했다. 긴 타지 생활의 종착지를 제주로 삼아, 그의 물방울들이 아름다운 제주에 미술관의 형식을 빌려 오래도록 머물길 바랐다. 평안남도 맹산 출신으로 북녘의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작가는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여겼다. 제2의 고향은 김창열의 마음에 화답해 그의 이름을 건 미술관을 지었다. 2016년 6월 초 준공한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의 탄생이다. 미술관은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김창열 화백의 작품을 모티브 삼아 빛의 중정과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2021년 새해가 밝은 지 얼마 안 된 지난 1월5일, 김창열 화백이 영면에 들었다. 제주엔 오랜만에 대설주의보가 내려 눈보라가 치던 1월7일이 발인이었다. 눈길을 헤치고서라도 김창열미술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영정에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칠 수 있어 다행이었다. 1월11일엔 미술관 인근에 있던 화백의 자택 부지에서 수목장을 치렀다. 그 나무에 국화꽃 한 송이를 한번 더 바칠 수 있어서 또 한번 다행이었다. 작가가 떠나고, 제주에 남은 미술관의 의미를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무로 돌아가는 죽음을 물방울로 돌아가는 것으로 빗댔던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미술관을 둘러보면, 물방울 작품들이 새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물방울에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찾았던 비상한 화가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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