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왕 록펠러, 러들로 학살 사건 주도자 오명→150조 기부(서프라이즈)

서지현 2021. 1. 1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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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 재단의 설립자 록펠러의 삶이 재평가되고 있다.

1월 17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석유왕 록펠러의 삶이 재조명됐다.

이에 더해 록펠러 측은 언론을 통해 '러들로 학살'을 광부들의 폭동 사건으로 여론 몰이했다.

또한 앞서 불거졌던 '러들로 학살' 사건에 대해선 당시 록펠러의 아들인 존 록펠러 주니어가 주도한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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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엔 서지현 기자]

록펠러 재단의 설립자 록펠러의 삶이 재평가되고 있다.

1월 17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석유왕 록펠러의 삶이 재조명됐다.

앞서 록펠러는 미국 석유 거래량의 약 95%를 독점하며 한화 약 500조의 재산을 가진 석유왕으로 알려졌다. 록펠러는 사기꾼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업에서 만큼은 그 누구도 믿지 않고 냉철한 전략을 펼쳤다고. 고등학교 중퇴 후 사업을 시작한 록펠러는 석유 산업의 가능성에 주목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사업을 확산시켜 대성공을 거뒀다.

이 가운데 1913년 록펠러 소유의 콜로라도주 광산에서 불법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 환경 개선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에 록펠러는 주 방위군과 민병대를 투입시켜 무력 진압에 총격까지 가했다. 이는 훗날 '러들로 학살'이라는 최악의 노동 참사로 기록됐다. 당시 광부들의 가족들을 포함해 총 66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그러나 재판 결과 파업에 참가한 광부들만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에 더해 록펠러 측은 언론을 통해 '러들로 학살'을 광부들의 폭동 사건으로 여론 몰이했다.

이후 록펠러는 1900년대에 들어서며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됐다. 이를 알게 된 절친이자 목사 프레드릭 게이츠는 록펠러에게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조언했다. 이에 록펠러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를 세워 기부금 약 5천만 달러를 내놨다. 이어 시카고 대학을 설립, 사회 다방면에 약 150조를 기부했다. 이후 록펠러는 97세까지 장수한 뒤 영면에 들었다.

록펠러의 사망 뒤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또한 앞서 불거졌던 '러들로 학살' 사건에 대해선 당시 록펠러의 아들인 존 록펠러 주니어가 주도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록펠러는 '악명 높은 사업가'라는 타이틀 대신 그의 삶이 재평가되고 있다. (사진=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뉴스엔 서지현 sjay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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