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쓰니 내장이 쏙 빠진 듯.. 그래도 죽을 때까지 쓰련다" [나의 삶 나의 길]

김용출 2021. 1. 1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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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수인'은
어머니는 소설가 되는 걸 말리셨지..
자기 팔자 남에게 내주는 일이라며
내 생에 우여곡절은 그 때문인가
'수인' 다 쓰고 '철도원 삼대' 결심해
최고의 작품 '철도원 삼대'
나는 늘 가장 최근 작품이 최고야
옛날 작품은 사실 가물가물하거든
'철도원 삼대' 민담식으로 잘 풀려
세상에 내고 나니 그 후련함이란..
당신의 삶은 어땠나
문학과 삶이 일치하는 걸 원했지
딱히 노력한 건 아닌데 살다보니..
민주화·통일 운동 하고 수형생활도
어차피 문학으로 남는 삶 후회없어
소설가 황석영은 “작가는 어디에도 억압당하거나 구속되거나 지배받거나 이래라저래라 받거나 눈치 보거나 해서는 안 된다”며 “작가는 결국 혼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느 점쟁이가 그러더라. ‘앞으로 물이 지나가니까 죽을 때까지 물을 떠먹을 수 있는데, 저수지가 없다더라’(웃음). 작가에겐 자유가 이거야”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앞으로 ‘철도원 삼대’ 같은 작품을 서너 권 정도 쓸 거요, 그 정도면 열심히 일한 겁니다. 근데 내가 세워 놓은 계획이 10가지도 넘는데, 이거 언제 다 쓰고 죽지.” 9년 만에 얼굴을 다시 맞댔지만, 구수한 입담이나 담대한 포부 모두 여전했다. 정정해 보이는 게 좋았다. 허리가 조금 굽어보이긴 했다. 이 말을 했더니, 그는 허리를 곧추 세웠다. “지금 운동을 더해야 합니다. 제 꿈이 조금 더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한 서너 권은 더 써야 합니다. 88세까지 쓰려고 해요.”

일본이나 북유럽에선 많은 이들이 ‘100세 현역시대’를 겨냥해 뛰고 있다고 전하자 목소리가 더 높아갔다.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 선생은 96세인데, 지금도 쓰고 있습니다. 작가는 은퇴라는 게 없어요. 죽을 때 펜을 잡고 죽어야지요. 그게 직업의식이고 장인이지.”

소설가 황석영은 코로나19에도 여여(如如)했다. 아니 여여한 정도가 아니라 ‘만년문학’을 제대로 펼쳐 보이겠다며 문학정신을 벼리고 있었다. 한파도, 눈도 펄펄 끓는 그의 열정을 식힐 수 없는 듯했다. 그의 작품 역시 최근 미국과 일본, 영국 등 해외 각국에서 속속 번역 출간 중이다. 최근 일본에서 자전 ‘수인’이 번역 출간된 것을 핑계로 그를 만나러 전북 익산으로 내려갔다.

새벽까지 내린 눈이 삼남의 산하를 하얗게 덮은 구랍 30일, 익산 유스호스텔에서 황석영을 만났다. 치과치료를 받느라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타났다. ‘비껴서서 남 얘기인 듯하는’ 모습 역시 여전했다. 그의 말은 존칭과 반말 사이를 자주 오갔다. 삶과 문학에서 새 길을 모색하려는 모습도 언뜻언뜻 내비쳤다. 가령 이런 식이다. “지금까지 일생을 ‘전사’로 살아왔는데, 이제부터는 ‘현자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느냐, 전사에서 현자로 가야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듭디다.”
-코로나19를 견딜 만한가.

“젊은 사람들이야 생활 절반 정도가 모여서 놀고 마시고 카페 가고 하는 것일 텐데, 불편하겠지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작가라는 게 방구석에서 틀어박혀서 일하고, 밖에 나가서 산책하고 하니까. 마스크 쓰고 다니는 것은 불편하더라. 사람들이 인상과 표정을 다 잃어버렸어요.”

-익산 생활은 어떤지 궁금하다.

“2017년 자전 ‘수인’을 냈지요. 사실 쓰기 싫었는데, 출판사와 얽혀 어렵게 쓰게 됐어요. 그런데 자전이 나오고 나니 묘하더라. 자전까지 쓰고 나이도 있으니 이제 그만 써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허전하면서 장기나 내장이 쏙 빠져나온 것 같았죠. ‘원로작가가 가는 길이라는 게 동어반복해 온 습성이나 작품 경향, 매너리즘을 뚫지 못하면 거기에서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남들이야 완성이라고 하겠지만, 작가가 완성이 어디 있어요, 죽을 때까지 써야죠. 그래서 ‘백척간두에서 더 나가야겠다, 수십년간 얘기만 해오고 못쓴 ‘철도원 삼대’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18년 5월, 트렁크 2개를 싸서 내려왔지요.”

자전 출간은 그의 만년문학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책은 소설가를 꿈꾸는 그를 말리던 어머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건 자기 팔자를 남에게 내주는 일이란다.”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내가 우여곡절이 많은 게 그것 때문이 아니냐”고 웃었지만, 자전은 “젊은 날, 당신의 고집을 꺾었던 아들이 다 늙어 어머니 영전에” 바치는 책이었다.
-‘수인’이 최근 일본에서 번역 출간됐다, 축하한다.

“일본에선 이미 (지난해) 12월10일쯤 번역 출간됐지요. 프랑스판은 1월 출판사 필리 피키에(Editions Philippe Picquier)에서 나올 예정이고요. 영어판은 출판사 버소(Verso Books)가 런던과 뉴욕에서 동시 출간할 예정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일정이 늦어져 8월로 연기됐어요. 거의 동시에 광주항쟁을 다룬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역시 버소에서 나오고요.”

-‘철도원 삼대’는 사실 오래전부터 해온 이야기인데.

“‘철도원 삼대’는 이렇게 굴리고 저렇게 굴리고 해서 나왔는데, 생각한 것과 다르게 나오더라. 딱딱하고 지루한 소설이 될 소재였지만, 스토리텔링이 매끈하고 민담식으로 잘 풀렸어요. 소설을 쓸 때 아주 즐겁게 썼지요. ‘철도원 삼대’를 세상에 던져놓고 나니 얼마나 후련한지 몰라요. ‘나의 시간과 인생이 저런 식으로 존재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작품을 쓰고 나서 용기가 났어요. ‘해볼 만하다, 더 해야겠다’고요.”

자신의 최고 작품을 하나 꼽아 달라고 하자, 그는 ‘철도원 삼대’를 꼽았다. 그런데 이유가 황석영답다. “옛날 작품은 가물가물해서 잘 모르겠어요. 나는 늘 최근에 쓴 작품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철대원 삼대’가 최고지. 다음 작품을 쓰면 그 작품이 최고작이 되죠(웃음).”

바야흐로 만년문학의 대지에 선 황석영 문학 여정의 출발은 1960년 4월 진동하는 서울의 거리였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을 좋아했던 고교 동창 안종길이 4·19혁명 당시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총탄에 숨졌다. 친구의 피가 함께 있던 그의 교복을 적셨고, 친구의 유고시집 ‘봄, 밤, 별’을 펴내며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이후 시대와 문학 사이를 분주히 왕래했고, ‘시대의 수인’과 ‘문학의 수인’ 사이에서 늘 흔들렸다. 남도 공사판을 전전했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으며, 1970년대엔 해남으로 내려가 문화운동의 춤판을 벌였다. 그 사이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입석부근’과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탑(塔)’이 차례로 당선돼 등단한 그는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등의 삶을 핍진하게 그리며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격찬을 받았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 단편 ‘객지’, ‘삼포가는 길’, 중편 ‘한씨 연대기’, 대하소설 ‘장길산’ 등이 있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는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했고, 급기야 1989년 금단의 땅 북한에 들어갔다가 망명과 구속, 5년 복역이라는 형극의 길을 걸은 그였다. 1984년 7월 ‘장길산’ 연재를 끝으로 10년 넘게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돌아가야 할 ‘집’은 문학이었다. 1998년 감옥에서 나온 뒤 다시 글을 쓰며 후반기 문학을 열었다.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해질 무렵’ 등이 그것이다.
-왜 대하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온건가.

“글쎄, 지금 후회되는 바가 있어요. 청년 작가 시절 ‘지향하는 문학과 개인적인 삶이 일치했으면 좋겠다,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사실 작가들의 경우 문학과 삶이 상당히 떨어져 있고, 떨어져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저는 ‘진정한 작가는 (문학과 삶이) 같이 어울려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노력한 건 아닌데, 살다 보니 삶도 소설처럼 같이 갔어요. 그러다 보니 개인적인 삶은 뒤죽박죽, 우여곡절이 돼버린 거지요. 지금 와서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문학과 작품은 남는 것이니까요.”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살았겠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 재미있다. “다시 태어난다는 가정 자체가 우스갯소리이지만, 농담에 부응해 얘기를 하자면, 다시 태어나면 딴 것 할 거야. 작가, 그거 다시는 안 해. 제일 재미없는 거야.” 그가 웃었고, 나도 웃었다.

-살면서 후회한 적은 없느냐(그는 언젠가 ‘가족’과 ‘재능의 과신’을 꼽았다.)

“가족이 늘 가슴에 얹혀 있어요. 특히 애들에게 해준 것도 없이 아버지 이름의 무게만 줘서 미안합니다. 어디선가 아버지 목소리는 들리는데도, 다른 아버지처럼 제대로 못해줬다는 게 미안하죠. (문학의 제단에 아버지를 빼앗긴 것 아닌가) 역사적으로 평화적인 시대나 사회가 아니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우여곡절이 너무 많았어요.”
-글 쓸 때 습관이나 징크스 같은 게 있는지.

“가장 큰 약점은 글을 쓸 때 줄담배를 피우는 겁니다. 젊을 때부터 글을 쓸 때는 담배를 물고 합니다. (얼마나 피우나) 하루 2, 3갑 정도. ‘철도원 삼대’를 쓸 때도 2갑 이상 피웠어요. 야간작업하는 것도 고쳐야 합니다. 밤 12시쯤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죠. 밤 도깨비로, 완전히 거꾸로 살아요.”

이 대목에서 그는 발자크를 소환했다. 황석영에 따르면, 발자크는 자정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글을 썼고 그의 하인이 다음날 아침에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목욕물 데우기’였다.

인터뷰가 끝나자, 우리는 영등동 갈비탕집까지 800미터 정도를 함께 걸어갔다. 농로 한 가운데에서 그는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지만 쉽게 붙지 않았다. 바람이 셌다. 나는 뒤에 서서 바람을 막는다고 막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몇 차례 시도 끝에 성공하자, 그는 길게 한 숨을 빨았다. 담뱃불이 벌겠다. 김훈이나 이문열, 박석무 등등을 얘기하며 우린 다시 농로를 따라 걸었다. 논에는 아직 눈이 흩뿌려져 있었다. 혹시 쓰고 있는 작품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벌써 문학으로 달떠 있었다.
“새 작품을 시작했어요. 제목은 ‘별찌에게’. 별찌는 별똥별의 별을 의미하는 순수 우리말인데, 번역하면 ‘디어 별찌’ 정도 되겠지. 만년의 노인이 암자 옆에 있던 숲의 추억을 쓰는데, 늦여름에서 초가을 넘어가는 그때 어느 숲의 얘기예요. 소설도 아니고 시도 아닌, 시 플러스 소설 형식의 ‘시설(詩說)’을 써서 새 장르를 개척해 보겠어요.”

그는 “이건 중간에 쉬어가는 참”이라고 했다. 차기작을 설명하는 그의 말은 점점 빨라지고 눈은 반짝거렸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 미륵사상과 인드라넷, 점성술, 천문학, 천체물리학, 불교생태학 등등. 키워드만 정리하기에도 숨이 가쁠 정도로 종횡으로 내달리고 질주했다. “이야기인 즉슨, 나이가 50억년인 별똥이 숲에 떨어지는데, 하루살이가 날아와 별똥에 앉곤 ‘날이 참 좋다’고 말하고….”

그리하여 그의 삶과 문학은 시대를 넘고, 아예 사람 아닌 존재로 달려갔으며, 저 멀리 별똥별과 우주로까지 치닫고 있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황석영 작가는 ●1943년 만주 장춘 출생 ●1947년 월남, 서울 영등포에 정착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입석부근’ 당선 및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탑(塔)’ 당선으로 등단 ●1989년 방북 및 망명, 구속과 복역(5년) ●주요 작품으로 단편 ‘삼포가는 길’ ‘객지’ ‘한씨연대기’ 등, 장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해질 무렵’ ‘철도원 삼대’ 등, 자전 ‘수인’, 논픽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편집 출간, ‘삼국지’ 번역 출간 ●만해문학상, 단재상, 아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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