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공동구매하는 '2030'.. 미술품의 가치를 나눠 갖는다 [심층기획]

김예진 2021. 1. 1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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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개의 작품 여러 사람들 나눠갖고
싫증나면 정기적으로 교환하기도
작가와 수집가들 정기적 만남 등
소액으로 컬렉터·작가 후원자로
밀레니얼세대 새 수요층 급부상
중저가 작품 거래도 활발해져
미술시장의 저변 확대 새바람
김남표 작가의 셀 시리즈가 지난달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에 위치한 아이프 라운지에 전시돼 있는 모습. 아이프 제공

미술품 소장.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다. 최근 미술계에는 ‘큰손 주춤, 개미 진출’이라는 변화의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기존엔 미술품을 소장한다고 하면 억대의 그림들을 컬렉터라 불리는 소수 부자들이 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요즘은 분위기가 다르다. 오히려 거액 작품 거래보다는 많은 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중저가, 신진 작품들의 온라인 거래에서 활력이 느껴지고 소액으로 구매할 아이디어가 경쟁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미술 시장 전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토양이 될 수 있어 주목된다. 그간 한국에서는 미술품을 소장하고 향유하는 문화가 워낙 척박했고, 대중의 층이 워낙 얇았던 탓에 “한국 미술시장은 한계가 뚜렷하다”는 말들이 많았다. 미술품을 소장, 거래하고 향유하는 문화가 확산돼야 그 나라 미술계와 작가들도 발전할 기회가 커질 수 있어서다. 최근 미술 시장의 저변 확대 움직임은 기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청신호가 되고 있다.

◆새로운 소유방식 제안하며 저변 확대

‘조각난 작품을 산다고?’ 지난해 11월 아이프 미술경영연구소, 갤러리인 호리아트스페이스가 공동으로 연 김남표 작가의 ‘검질’ 전시에서 일명 ‘셀(cell) 시리즈’를 처음 선보였을 때, 성공 여부에 반신반의한 반응이었다.

셀 시리즈는 마치 타일처럼 작은 조각 캔버스들에 쪼개 그림을 그리고, 그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이루는 방식으로 완성된 대형 작품들이었다. 가령 셀 시리즈의 하나인 제주도 잡초 넝쿨 풍경 작품은 가로 25㎝, 세로 25㎝ 크기의 작은 캔버스 53조각 그림들로 이뤄졌으며, 조각들이 모여 전체 크기 세로 185㎝ 가로 270㎝의 대형 작품이 된다. 한 사람이 53조각을 전부 구매할 수 없고 한 사람당 1∼4개씩만 구입할 수 있게 한다는 프로젝트 계획도 내놨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그림을 나눠 갖고 정기적으로 교환해 걸어볼 수 있으며, 작가와 소장가들이 정기적으로 만나고 감상을 나눈다는 구상이었다. 조각 그림을 산 사람들은 수천만원 거액을 들이지 않고도 한국의 대표적인 중진작가의 작품을 소장한 컬렉터이자 후원자가 되는 셈이다.
김윤섭 아이프 대표는 “요즘 미술품의 투자가치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공동구매가 유행하고 있는데, 이런 방식은 증서를 받고 지분을 확보하는 것일 뿐이고, 철저히 작품의 경제적 가치만 나눠 갖는 것”이라며 “미술품이 갖는 가치까지 나눠 진정으로 공동소유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일까 고민했다”고 소개했다.
이 프로젝트는 결국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아이프 측은 15일 “19명에게 25점이 판매됐다”며 “의사, 변호사, 배우, 영화감독, 가수, 자영업, 주부 등 작품을 소장한 구매층은 매우 다양했다”고 후기를 전했다. 이어 “구매자들은 공동소장이라는 취지에 깊게 공감했으며 구매 이후에도 소장자와 작가가 교감할 수 있는 기회가 지속된다는 점에 매우 큰 관심과 매력을 느끼는 모습이었다”고 소개했다. 작품을 소장한다는 의미가 단순히 소유욕이나 재테크 수단을 넘어 창작자에 대한 심적 후원과 응원의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라는 점도 공감을 일으켰다고 한다. 기획의도가 들어맞은 것이다.
아이프 측은 “미술품을 소유하고자 하는 관심과 실천 사례가 매우 늘어난 것을 체감한다. 특히 연령도 젊어지고 연령과 계층도 다양해졌다”고 했다.

◆새로운 소비층 발굴로 저변 확대

새로운 수요층을 발굴하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있는 것도 미술 시장 저변 확대의 뚜렷한 양상이다. 특히 밀레니얼세대는 명실상부한 신흥 수요층. 한 30대 전문직 여성 김모씨는 국내 메이저 경매사 서울옥션이 아트상품 거래 대중화를 목표로 만든 자회사인 프린트베이커리를 여러 차례 이용했다. 김씨는 “미술에는 문외한이지만, 집에 그림이 있어야 멋지다고 생각해서 항상 관심이 있었는데 소장가치도 있고 가격도 괜찮은 작품을 파는 곳이라 해서 이용하게 됐다”며 “선물용으로도 이용하는데, 그림이 흔한 선물은 아니다 보니 받는 사람들도 좋아한다”고 경험담을 소개했다. 화랑 대표들은 코로나19로 주거 공간을 꾸미려는 욕구와 재테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방탄소년단 등 유명 인사들이 방송이나 소셜미디어에서 미술품을 소장 행위를 노출하면서 젊은 층에 큰 영향을 미친 것 등을 밀레니얼 소비층 부상의 이유로 꼽곤 한다.
서울옥션은 자회사 서울옥션블루를 통해 밀레니얼세대를 주요 타깃으로 한 공동구매 플랫폼 ‘소투(SOTWO)’ 출시도 앞두고 있다. 거래대상은 한정판 스니커즈부터 미술품까지 밀레니얼세대 취향을 공략하고, 투자금 문턱은 최대한 낮춘다는 계획으로 최소 공동구매 금액을 1000원으로 설정했다.
또다른 경매사 케이옥션은 지난해 온라인 경매에서 젊은 미술품 경매 입문자들이 유입되는 것을 확인하고 가능성을 봤다. 이후 온라인 라이브 응찰 등 디지털 방식의 경매를 계속 업그레이드해 나갔다.
온라인 경매와 중저가 작품들도 거래가 활발해진 것은 수치로도 학인됐다. 사단법인 미술 시가감정협회가 최근 조사한 ‘2020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 결산’ 자료에 따르면, 국내 미술품 경매사 8곳에 출품된 작품 수는 3만점을 최초로 넘어섰고 이 가운데 1만8349점이 낙찰되는 등 거래량이 증가했다. 반면 작품별 낙찰 최고가 1위가 전년도의 절반도 안 되는 약 27억8800만원으로 나타났고, 매출액도 1153억원으로 2017∼2019년도에 2000억원 안팎이었던 것과 비교해 크게 낮았다. 온라인 경매에 공을 들인 경매사들의 실적이 눈에 띄게 높았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는 ‘큰손’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줄었음을 반증하는 동시에 대중의 관심이 높아져 그간 저평가돼 온 한국 근현대미술과 고미술 거래가 활발했던 것으로 분석했다. 협회의 김영석 감정위원장은 “미술 경기가 조금만 되살아나면 그만큼 미술품 경매시장의 대중화가 크게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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