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로 재탄생한 OCI 창업주 붓글씨 [인사이드 아웃]

정승환 입력 2021. 1. 1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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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회림 OCI 명예회장 글씨 '身分無物'
손녀 이지현 OCI미술관장과 대만 작가 손 거쳐
현대적 감각의 미술작품으로 다시 태어나
이 명예회장, OCI미술관 5층서 서예 즐겨
인천 소다회 공장은 민간간척사업 제1호
해방 후 한국 산업화의 주역 '창업 1세대'
미술관과 작품 8000여점 인천시에 기부
고 이회림 OCI 명예회장이 남긴 글씨 `신분무물` /사진=OCI미술관
[인사이드 아웃] 고(故) 이회림 OCI 명예회장의 붓글씨가 미술작품으로 재탄생했다. 기획 아이디어는 이 명예회장의 손녀인 이지현 OCI미술관 관장이 냈다.

16일 재계에 따르면 고 이회림 OCI 명예회장의 붓글씨 '身分無物(신분무물)'이 대만 작가의 손을 거쳐 현대미술로 다시 태어났다. 이지현 관장은 "2018년 말 OCI미술관 레지던시에 입주해있던 대만 작가 미아 리우(Mia Liu)와 만나 작품 이야기를 나누면서 할아버지 서예 작품 아이디어가 나왔다"며 "수천 개의 명예회장님 작품 중에서 작가가 '신분무물'을 선택했다"고 전했다.

身分無物은 身外無物(신외무물)의 변용으로, '무엇보다 몸이 중요하다.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큰일을 할 수 없다'란 의미다. 이를 미아 리우 작가는 'Nothing Extra'로 표현했다.

미아 리우 작가가 이회림 명예회장의 글씨로 작품을 만드는 모습 /사진=OCI미술관
미아 리우 작가는 이 명예회장의 붓글씨 위에 천을 덧대고 패턴을 입혔다. 패턴은 연필 드로잉으로 표현했다. 이를 통해 서예의 굴곡과 생동감을 현대적으로 살려냈다.

미아 리우 작가는 "'신분무물'을 썼던 이 명예회장의 마음가짐이 궁금하다"며 "성공한 사업가로서 평생 부족함이 없었을 텐데, 서예로 추구한 것은 영혼의 정화일지, 아니면 이런저런 삶의 고민을 어루만지는 것일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고 말했다.

현대미술로 재탄생한 이회림 OCI 명예회장의 글씨 /사진=OCI미술관
현대미술로 재탄생한 이회림 명예회장의 글씨 /사진=OCI미술관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한 OCI미술관 5층엔 이회림 명예회장이 쓰던 방이 보존돼 있다. 이 방에는 지금도 붓글씨를 연습하던 고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붓과 벼루, 먹은 물론 직접 글씨를 연습한 종이도 방 한쪽에 쌓여 있다. 똑같은 글자도 마음에 들 때까지 수십 번씩 쓰고 또 썼던 그는 마음 다짐을 붓글씨에 눌러 담았다. OCI미술관은 이회림 명예회장이 1954년 구입한 집을 개조해서 만들었다.

이 관장은 "명예회장님은 소공동 본사에 출근했다가 오후엔 미술관 5층 방에서 서예 글씨를 썼다"며 "손자들 결혼 사주단자 글과 제사 지낼 때 쓰는 지방도 직접 붓으로 쓰셨다"고 전했다. 사주단자는 혼인이 결정된 후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신랑의 사주를 적어서 보내는 종이다.

고 이회림 OCI 명예회장이 붓글씨를 쓰던 모습 /사진=OCI미술관
그는 서예 작품을 사무실에 걸어놓거나, 직원들에게 선물했다. 휘호의 변천사는 사업의 성장과 궤적을 같이한다. 사업 초기 智仁勇(지인용), 1970년대엔 中庸處世(중용처세)를 강조했다. 성장을 달리던 80년대엔 '내일을 위하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90년대엔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 휘호를 즐겨썼다. 말년에는 '먼저 사람이 되라'는 휘호를 자주 사용했다. 고 이회림 명예회장은 전주 이씨 익현군 18대손이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3년 동안 한학 공부를 했다. 한자 실력은 이때부터 길렀다.

이 명예회장은 저서에서 "나는 부족하거나 지나치지도 않으며, 편중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의미로 '중용처세'를 붓으로 써서 각 사무실에 걸어놓아 임직원들이 보도록 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내가 후진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서예는 평생 취미였다. 기업을 경영하면서도 지필묵을 늘 곁에 뒀다.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은 거의 빠지지 않고 다녀왔다. 1950~1960년대 당시 입선 작가들과는 말년까지 우의를 지켰다. 이영복 화백, 최의순 조각가, 장우성 화백, 김기창 화백 등은 고인과 교류했던 예술가들이다.

고 이회림 OCI 명예회장이 남긴 서예작품들 /사진=OCI미술관
이 명예회장은 미술작품 수집에도 정성을 쏟았다. 특히 고서화와 도자류 등 골동품 수집에 역점을 뒀다. 그는 1992년 인천에 송암미술관을 건립한 후 그곳에 평생 모은 작품들을 보관했다. 인천은 동양화학 공장이 있던 OCI그룹의 사업 초기 본거지다. 이 명예회장은 평생 모은 작품 8000여 점과 미술관 건물, 대지를 2005년 인천시에 기부했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은 "바쁜 기업가가 문화재를 수집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우리 문화를 좋아하고 문화재 보존에 정성을 들인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이 관장은 "OCI미술관은 젊은 신진작가들을 발굴하고, 그 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해준다"며 "예술활동 지원은 국가 문화 융성의 기반이며, 이는 이회림 명예회장이 바라던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회림 명예회장은 OCI 창업주다. 그는 1937년 개성에 건복상회를 세우며, 경영자의 길에 나섰다. 해방 후 서울에 진출해 이합상회를 설립했으며, 1948년 개풍상사를 세웠다. 그는 대한탄광, 대한양회공업, 백시멘트 회사인 유니온 등을 경영했다. 1959년엔 민간자본으로 만든 최초의 은행인 서울은행 창립 주주로 참여했으며, 동양화학(현 OCI)을 설립했다. 1965년 한국 공공차관 제2호인 AID 차관 560만달러로 인천시 학익동에 소다회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이때 바닷가에 제방을 쌓아 마련한 80만평 규모 해안 매립지는 민간 간척사업 1호다. 인천 공장은 1968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동양화학은 2001년 제철화학과 합병해 동양제철화학이 됐다. 동양제철화학은 2009년 상호를 OCI로 변경했다. OCI는 재계 35위로, 공정자산은 9조9000억원에 이른다. 2019년 연결 매출은 2조6000억원을 기록했다. 대표이사는 이회림 명예회장의 손자 이우현 부회장이다. 이회림 명예회장의 차남 이복영 회장은 SGC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SGC그룹은 SGC에너지, SGC이테크건설, SGC솔루션, SGC그린파워, SGC디벨롭먼트 등으로 구성됐다. 삼남 이화영 회장은 유니드 대표이사다. 유니드는 이회림 명예회장이 1980년 설립한 탄산칼륨 제조사다. 당시 이 명예회장은 미국 다이아몬드샴록사와 합작해 유니드(당시 한국카리화학)를 세웠다.

[정승환 재계·한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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