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액션이 아니어도 할리우드에서 통한다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2021. 1. 16.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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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사
'동양 배우=액션 배우'라는 인식 무너져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미국에서 날아들고 있는 배우 윤여정의 수상 릴레이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Lee Isaac Chung·리 아이삭 정) 감독이 연출한 영화 《미나리》로 윤여정은 오스카 레이스에서 트로피를 휩쓰는 중이다. LA, 보스턴, 오클라호마, 콜럼버스, 그레이터 웨스턴뉴욕비평가협회, 선셋필름서클어워즈 등 벌써 11개의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품었다. 대중과 언론의 시선은 오스카로 향한다.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연기상에 노미네이트 될 것인가. 오른다면 수상자로 기록될 것인가.

수상 여부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상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상은 문화적인 차원에서 의미를 갖기에 중요할 수 있다. 지금의 윤여정 행보가 그렇다. 단순히 한국 배우가 오스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을 뛰어넘어, 동양인 배우로서 시장의 다양성에 일조하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오스카 4관왕을 안은 《기생충》이 백인 위주의 미국 엔터테인먼트 영화 산업에 큰 영향을 끼친 것과 같은 의미다. 선례의 힘은 센 법이니까. 물론 윤여정 개인에게도 유의미하다. 《미나리》가 앞으로 그의 배우 인생에 어떤 기회를 더 열어줄지 모르는 일이다.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판씨네마㈜ 제공

영화 《미나리》 통해 트로피 휩쓴 윤여정 주목

윤여정의 행보를 보면, 과거 한국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사가 떠올라 여러 감정이 밀려온다.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배우는 대개 무술 고수이거나, 악당이거나, 주인공 친구이거나, 그도 아니면 괴짜로 그려져왔다. 그중 가장 강한 건 '동양 배우=액션 배우'라는 인식이었다. 이소룡이 《용쟁호투》로 미국에서 안타를 치고, 성룡이 《홍번구》로 득점하고, 《와호장룡》이 홈런을 날리면서 이러한 인식은 강해졌다. 게다가 대다수 서양인 눈에 동양인은 국적과 상관없이 그냥 동양인일 뿐이다. '동양 배우=액션 배우'라는 인식은 자연스럽게 '한국 배우=액션 배우'라는 편견을 낳았다. 아시아 시장을 노린 전략적 캐스팅이 많아지면서,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언어 제약이 있는 아시아 스타에게 연기 대신 액션을 요구하는 경우가 잦았던 것도 편견을 키웠다.

과거 한국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은 이러한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가장 많이 쓰인 전략은 할리우드 주류 영화에 악당이나 액션 배우로 출연한 후, 주연으로 발돋움하는 그림이었다. 표정 연기가 일품이고, 중저음의 목소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연기파 배우 이병헌은 할리우드 영화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에 출연하는 대가로, 하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농밀한 감정 연기 대신 칼을 들어야 했다. 비 역시 《닌자 어쌔신》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며 액션을 연마했다. 언론이 주목한 건 그의 연기가 아니라,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줄어든 체지방량이었다.

충무로의 트렌드 아이콘 전지현도 할리우드에선 신인일 뿐이었다. 《블러드》에서 뱀파이어 헌터로 분해 와이어에 매달렸다. 장동건은 《워리어스 웨이》에서 대사보다 액션을 더 많이 구사했다. 즉, 할리우드 진출을 위해 배우들이 양보한 건 자신들의 특기와 매력이었다. 이 중 전략적 캐스팅을 넘어, 감정 연기를 선보일 작품으로까지 기회를 넓힌 건 이병헌이 유일하다. 배우의 실력을 따지려는 게 아니라, 동양 배우를 향한 할리우드의 벽이 그만큼 견고했다는 이야기다. 불과 10년도 안 된 이야기다.

이병헌이 액션 연기에 머무르지 않고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던 데는 특유의 언어 감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정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많은 배우가 액션 연기로 할리우드 문을 두드릴 때 그는 농밀한 멜로 연기로 가능성을 타진했다. 베라 파미기와 호흡을 맞춘 《두 번째 사랑》이 그 결과물로, 이 영화는 선댄스영화제에도 진출하며 적잖은 관심을 받았다. 그가 《두 번째 사랑》에 출연할 수 있었던 데는 할리우드 진출을 대비해 학습한 영어 실력이 큰 몫을 했다. 그리고 유창한 영어 실력의 소유자 김윤진이 있다. 미국 TV 시리즈 《로스트》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김윤진은, ABC 드라마 《미스트리스》에선 전형적인 동양 캐릭터에서 벗어난 주인공 역할을 따내며 할리우드에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그런 의미에서 윤여정이 한인 가정의 이야기를 한국어로 연기한 영화로 할리우드에서 인정받고 있는 건 의미심장하다. 여기엔 시장의 거대한 변화가 있다. 2018년 8월 할리우드에선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흥행으로 아시안 바람이 거셌다. 출연진 전원이 아시아계 배우들로만 구성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아시아 문화를 다룬 영화가 세계적인 티켓파워를 가질 수 있음을 할리우드 투자사들에 각인시키는 거대 사건이었다.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작품들이 주로 받아들여져온 할리우드에서, 동양인들의 문화가 콘텐츠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계 히어로를 내세운 《샹치》, 다인종(파키스탄 출신 쿠마일 난지아니, 멕시코계 셀마 헤이엑, 아프리카계 흑인 브라이언 타이리 헨리, 한국계 마동석)으로 구성된 《이터널스》를 통해 새롭게 도전하는 마블의 행보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치 않다.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로 아카데미를 휩쓴 《기생충》, BTS가 한국어 가사로 된 노래로 세계시장을 휩쓴 흐름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영화 《두 번째 사랑》의 한 장면 ⓒ프라임엔터테인먼트 제공

OTT가 가져온 변화의 흐름

봉준호 감독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받으며 "서브타이틀(자막)의 벽을 1cm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수상 소감으로 유색인종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에 거대한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선 이렇게 말했다. "1인치 장벽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때늦은 소감이 아니었나 싶다. 이미 장벽은 무너지고 있는 상태다. 유튜브, 스트리밍,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이미 모두가 연결돼 있다. 이제는 외국어 영화가 이런 상을 받는 게 사건으로 취급되지 않을 것 같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올 것 같다."

실제로 유튜브, 스트리밍, 인스타그램 등으로 세계는 하나의 생활권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특히 OTT 플랫폼을 타고 콘텐츠의 국가 간 장벽이 빠르게 허물어지면서, 배우들 역시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시장에 소개되는 중이다. 가령 《살아있다》는 2020년 미국 넷플릭스 회원들이 가장 많이 시청한 외국영화 4위를 기록했는데, 이를 통해 유아인과 박신혜도 세계 시청자들의 머리에 자연스럽게 입력됐다. 마침 할리우드에선 '脫화이트워싱' 바람도 거세지는 상황. 이런 분위기에 힘을 싣는 프로젝트들도 쏙쏙 포착되고 있다. 미국 애플사는 1.5세 한인 작가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의 드라마 제작에 박차를 가하는 중인데 한국어·영어·일본어 3개 국어로 만들어지는 이 글로벌 프로젝트에 이민호, 윤여정, 정은채 등이 캐스팅된 상태다.

과거 정우성은 할리우드 진출 의향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성룡이나 이연걸 같은 무술의 고수가 돼야 지속적으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할리우드가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동양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주요한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런 그가 주연을 맡은 작품들은 지금 OTT를 통해 전 세계에 유통되는 중이다. 무술의 고수가 아니어도 할리우드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 한국적인 정서로 세계에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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