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락 "한국 외교, 포퓰리즘·아마추어리즘 포로됐다"

노석조 기자 2021. 1. 16.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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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락 전 주러 대사. /조선일보

‘베테랑 외교관(veteran diplomat)’ 위성락(67) 전 러시아 대사가 최근 책을 냈다. 제목은 ‘한국 외교 업그레이드 제언:새로운 북핵, 4강 외교를 위하여’.

36년간 몸담은 외교부를 2015년 중반 떠나 지난 5년여간 ‘대한민국 외교’를 고찰한 결과물이다. 그의 펜촉은 비단 현 정권의 외교만 가리키지 않았다. 보수·진보 가리지 않고 역대 정권 외교의 공과 실을 고루 썼다. ‘국뽕(지나친 국수·민족주의를 비꼬는 신조어)’을 경계하며 우리의 외교를 다른 나라 사례와 견줬다. 수직·수평 비교를 했다.

위 대사는 책에서 “현직에 일하는 내내 한국 외교가 4강에 둘러싸이고 핵을 가진 북한과 직면하는 나라답지 않게 정책·전략과는 거리 있는 행정적이고 행사·인기 위주의 대처에 머물러 있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 원인은 한국 특유의 외교 생태계에 있다”면서 “외교 사안을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적이고, 국내 정치 위주, 이념·당파적 관점으로 대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이런 것이 “외교 담론을 오염시키고 있다”면서 “한국은 외교가 포퓰리즘과 아마추어리즘에 붙잡혀 있다는 특징도 있다”고 지적했다.

◇‘우물 안 개구리’ 외교에 빠졌다

한국 중심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사고가 논의를 주도해 장기적 전략적 사고가 뒤로 밀려, 결과적으로 정글 같은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입지가 궁지로 몰리는 일이 반복됐다고 그는 지적했다. 일례로 2005년 6자 회담에서 나온 9·19 공동성명을 한국이 주도하여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을 꼽았다. 북한의 핵 도발 과정에서 미국의 역대 정부가 수차례 한반도 전쟁을 일으키려 했는데, 우리 한국 정부가 나서 극적으로 막았다는 주장도 유사한 예라고 했다. 그는 “모두 사실과 거리가 먼 자기중심적 해석”이라며 “문제는 이런 주장이 상당한 호응을 얻는다는 것”이라고 했다.

위 대사는 이런 문제의 역사적 배경으로 ‘중화 질서’에 대한 순응적 자세를 짚었다. 그는 “우리는 근세 수백년간 중국 주도의 수직적 대외 관계 체제에 적응하며 살았다”면서 “조선은 몇 차례의 전란을 빼고는 오랜 기간 중화 질서 속에서 안정을 누렸다”고 했다. 이 때문에 “조선이 대외 문제에 대한 심각한 관점과 인식을 배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유럽에서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스페인·프러시아·러시아 등 비슷한 국력의 세력이 서로 쟁패하고 연대하는 역동적 대외 관계가 상시로 이뤄진 상황과 동아시아의 외교 역사는 달랐다.

의전과 형식에 집착하는 중화 질서 사상에 빠진 청나라는 이런 역동적 유럽 세력에 판판이 깨졌는데,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도 마찬가지였다고 위 대사는 지적한다. “본질보다 형식주의에 경도되고,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으로 사안을 파악하는 오지사고(奧地思考) 성향은 조선에서도 팽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조선은 식민지가 되고 말았는데, 이에 따라 저항적 민족주의가 강해졌고, 외부에서 벌어진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도 민족주의적 색깔로 해석하는 경향이 굳어졌다고 분석했다. 조선과 구한말 그리고 일제 식민 시대의 우리 모습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세기를 넘어선 2021년에도 이런 경향은 여전하다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특정 국가에 대한 반감을 조장해 손쉽게 정치적 이득을 꾀하는 정치인들은 여의도에 하나 둘이 아니다.

◇꼬리(국내 정치·이념)가 몸통(대외 정책)을 흔든다

대외 문제가 툭하면 국내 정치의 종속 변수로 다뤄지는 상황도 한국 외교의 고질병으로 지적됐다. 외교가 국내 정치에 악용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위 대사는 그런 행태의 배경으로 6·25전쟁 그리고 냉전(冷戰) 시대를 언급했다. 주요 외교사안이 반공에 초점을 두고 돌아가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박정희·전두환 등 권위주의 정권 때는 주요 외교 과제가 국내외 비판을 막아내는 것이었다고 했다.

위 대사는 1972년 박정희·김일성의 7·4 공동성명도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위한 하나의 여건 조성 차원에서 추진된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이렇게 탄생한 7·4공동성명을 “흥미롭게도, 진보 진영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 “민주화 투쟁해온 진보 진영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10월 유신'을 추동하기 위한 계략에 이용된 7·4성명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꼬집었다. “진보 진영은 김일성 원칙을 맹종한 반민주 독재 기도도 남·북 협력이라는 모양만 갖추면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니, 이 또한 이념적인 관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론 무서워 할 일마저 회피해서 되겠나”

위 대사는 “한국 외교 생태계가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적이며 국내 정치 중심 사고에 휩쓸리고 이념·당파적 대립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외교와 관련한 여론도 비합리적인 방향으로 쏠리기 쉽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여기에 민주화 기세가 가세해 다중의 견해가 더 중요시 되고, 자연히 외교 담론은 그것이 오도된 여론일지라도 다중이 표출하는 감정에 좌우된다”고 했다. 이에 “집권 엘리트나 정치권은 물론 관료까지 포퓰리즘에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고 행동하는 경향을 보였다”며 “인기와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어렵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결정조차 회피하는 일이 아주 흔하게 됐고 그 대표적 사례가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라고 말했다.

◇외교 아마추어 정치인이 외교 좌지우지

외교가 포퓰리즘에 포획되면서 전문가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오히려 목소리 큰 아마추어가 득세하는 상황도 바로 잡아야할 과제로 위 대사는 꼽았다. 그는 “외교가 다중의 여론에 부응하는데 집착할수록 전문가의 입지는 줄어든다”면서 “비전문가인 정치권 인사가 중심돼 외교 사안을 다루는 일이 더 빈번해지고 있다”고 했다. “외교 사령탑의 요직을 식견과 경험이 제한된 비전문가에게 맡기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면서 “외교는 곧잘 총성 없는 전투에 비교되곤 하는데, 이 비유에 따르면, 총참모부 요직에 전문 지식과 전투 경험이 없는 인사가 보임되는 셈”이라고 했다.

이런 문제에는 외교관들의 잘못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관료 집단이 대단한 전문성으로 외교에 큰 역할을 해온 것도 아니었으니, 이런 현상은 관료의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위 대사는 “나라 외교 발전의 바람직한 해법은 주요 외교 업무를 맡길 인사에게는 해당 분야에 대한 높은 식견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방향이 돼야 할 것”이라며 “그렇지 않고 비전문성을 선양하는 방향으로 가면 눈치 빠른 관료들은 아마추어리즘 수준에 맞춰 복무하고 처신하는 것이 자신의 신상에 유익하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런 분위기는 그나마 남아 있던 관료의 전문성마저 더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아마추어리즘은 자기중심·감정적 관점, 국내정치에 종속된 외교, 이념성과 당파성, 포퓰리즘에 이은 5대 외교 수렁”이라고 했다. “이 수렁들은 서로 서로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면서 한국 외교 선진화를 저해할 것이다.”

위성락 전 주러 대사의 신간 '한국 외교 업그레이드 제언'. /노석조 기자

책의 표지가 바둑판이다. 여섯 돌에 태극기, 인공기 그리고 미·일·중·러 등 4강 국기가 그려졌다. 무슨 의미일까, 15일 위 대사에게 물었다.

“한·미·일이 북한을 단수(單手) 치고(둘러싸 활로 하나만 두게 한 상태), 북·중·러가 미국을 단수친 형국입니다. 북핵, 4강 외교의 난이도를 보여주고, 향후 대응 수가 중요하다는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외무 행정보다 정책과 전략이 중요하다는 책의 취지도 담았습니다.”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공부하고 13회 외무고시에 합격, 1979년 외무부에 입부한 위 대사는 36년간 주로 미국과 북핵 업무를 다뤘다. 북미 국장 겸 6자 회담 차석 대표, 주미 대사관 정무공사,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겸 6자회담 수석 대표를 역임했다. 2011~2015년 주러 대사를 끝으로 퇴직해 현재 외교안보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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