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더블 이벤트 문성길 이경연 세계 타이틀전 뒷 이야기' [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조영섭 2021. 1. 16.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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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며칠 전 명일역 인근에서 문성길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는 전 IBF 미니멈급 초대챔피언을 지낸 이경연 관장을 찾아 담소를 나누다보니 지난 빛바랜 추억이 새록 새록 솟아났다.

지난 83년 광주대통령에 라이트 플라이급 8강에서 전북 대표로 참가한 필자가 경북대표로 참가한 이경연과 맞대결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코크급에서 한체급 올려 출전한 이경연은 복싱에 입문한지 1년도 채 안 된 새내기였기에 승패에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복싱 경력 4년의 커리어를 지닌 이효필이 복싱에 입문한지 5개월도 채 되지않은 박종팔을 신인 대회에서 2차례 꺾었다고 지난 과거를 더더욱 자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프로복싱은 장기전인 마라톤이다. 아마복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게 프로복싱 이다. 필자가 85년 12월 13일 대구에서 벌어진 10차전에서 신라체육관 김사영에게 6회 KO패 당하면서 복싱을 접을 때 현장에서 필자의 경기를 참관한 이경연은 작지만 강단 있는 테크닉으로 기량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해 당시 4전 전승을 거두고 신인왕전 결승에 오른 유망주였다. 

명일동 문성길 복싱 클럽 이경연 관장(좌측2번째)과 관원들

이경연은 1965년 1월 출생한, 시대를 앞서간 풍운아 정도전의 고향인 경북 봉화 태생으로 영주공고에 입학한 1982년 3월, 백낙춘 관장의 지도로 복싱에 입문한 그는 83년 10월 제64회 전국체전 코크급 8강서 그해 7월 청소년대표 선발전에서 후에 WBA WBC 플라이급 양대 기구 챔피언에 등극하는 김용강(당시 보인상고)을 5:0 판정으로 꺾은 강원대표 신명수(원주대성고)와 맞대결해 시종일관 압박권투를 펼쳐 판정승을 거두며 이변을 일으킨다.

아마추어 시절 김용강은 사우스포 킬러로 국가대표 변정일(동국대)에 두 차례 판정승을 비롯해 85년 9월 제3회 세계 청소년 선수권(루마니아) LF급 금메달 황정섭(서원대), 국제대회 5관왕 서정수(홍익대)등 역대급 사우스포 들을 차례로 잡으며 명성을 날렸고 프로에 전향해서도 일본의 WBC 플라이급 챔피언 레오파드 다마꾸마를 꺾고 WBC 플라이급 챔피언에 오른 콜롬비아의 에비스 알바레스같은 사우스포 세계 챔피언들을 모조리 격파한 복서였지만 사우스포인 신명수의 칼날 같은 스트레이트를 거푸 허용하며 충격적인 완패를 당했다. 이경연은 준결승에서 최희용(부산체고)에 패배 동메달에 머문다. 이후 경남 선발전에서 최점환(경주상고), 신주섭(경남대) 등에  밀려 정착하지 못하고 85년 12월 4일 88프로모션에 스카웃되어 프로로 전향 한다. 

이경연은 프로에 전향해서도 영역싸움에서 밀려 당시 신인왕전에서는 한 체급 당 두 명 이상 출전할 수 없다는 규정에 의해 같은 체급인 강정호, 한상현이 88체육관 소속으로 출전한데 반해 이경연은 편법으로 전일 체육관 소속으로 출전한다. 하지만 이경연은 8강에서 5전 전승의 강정호에 한 차례 녹다운을 뺏는 등, 우세한 공격으로 판정승을 거둔데 이어 준결승전에서 역시 9전 7승 1무 1패를 기록한 한상현을 잡고 올라온 양동필(극동체)에 판정승 5전 전승을 기록하며 제15회 전국 신인왕전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신인왕에 등극하면서 때마침 프로복싱 제3기구인 IBF가 태동하며 미니멈급(47.6kg)이 신설되면서 신인왕전 우승과 함께 10전 전승 3KO승의 일천한 전적으로 파격적으로 세계 랭킹에 진입한다. 당시 '우수신인왕'은 플라이급의 최창호가, '최우수신인왕'은 주니어 웰터급의 유근천이 차지했다.

성공이란 인생살이와 마찬가지로 실력과 운(運) 그리고 타이밍이 조화를 이뤄 탄생한 집결체(集結體)라는 생각이 든다. 몇 차례 전초전을 치르면서 워밍업을 마친 이경연은 1987년 6월 5일 대망의 세계타이틀전을 치른다.

83년 10월 창단한 88프로모션은 그간 엄청난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1985년 1월 박광구가 전주도에게 IBF jr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15회 KO패한 경기를 서막으로 박조운이 최점환과 롤란도 볼에게, 윤석환이 와다나베 지로에게 연달아 참패를 당하면서 세계타이틀전 4연패의 흑역사를 지닌 채 결정전을 갖는 의미있는 세계타이틀전이었다. 당시 도전자 가와카미 마사히로는 9전 8승(7KO승) 1패를 기록한 IBF 세계 2위 중견복서로 아마추어 전적도 20전 18승(10KO승) 2패를 기록한 만만치 않은 상대였지만 이경연은 홈링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초반부터 예리한 연타공격으로 주도권을 잡고 2회 39초 만에 KO승을 거두며 11전만에 88프로모션 초대챔피언에 등극한다. 이로써 한국은 5명의 IBF 챔피언을 탄생시키며 총 8명의 세계챔피언을 보유한 한국 복싱은 외형적으론 복싱 강국으로 발돋음 했다.

이영록 트레이너와 이경연 챔프(우측)

이경연의 챔피언 등극 일등공신으로 그를 처음에 복싱에 입문시킨 백낙춘 관장과 함께 그를 프로 데뷔전부터 지도한 숨은 조력자 이영록 사범의 탁월한 지도력을 손꼽고 싶다. 1937년 경남 울산 출신의 이영록 사범은 90년 북경 아시안게임 라이트급 금메달 이재권(울산 학성고)을 발탁해 훈련에 성공시킨 지도자이며 그는 1957년 59년 두 차례 전국체전 금메달(플라이급)을 획득한 후 이어 60년 국군선수권 금메달을 획득해 테크니션으로 은퇴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고 그의 맞춤형 지도로 이경연은 세계 정상에 등극한 것이다. 그는 이경연 외에도 13전을 싸워 6승을 기록한 김기창과 9전을 싸워 단 1승을 기록한 강철의 트레이너를 맡아 이들을 모두 동양 챔피언에 등극시키는 트리거(trigger)역할을 톡톡히 수행한 트레이너로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 내면서 선수 특성에 맞는 특화된 지도법으로 명망 높은 분이었다. 88년 1월 이경연은 IBF 타이틀을 반납하고 신설된 WBC 스트로급 챔피언에 등극한 홈링(오사카)의 챔피언 일본의 이오카 히로키(9전 전승 5KO승)와 맞서 주도권을 잡고 주무기인 좌우훅이 불을 뿜으면서 7회부터 승기를 타 11회까지 파이팅 넘치는 경기력을 보여줬다. 비록 적지라서 11회까지 동점인 상황에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통한의 12회 역전 KO패를 당했지만 후회없는 일전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이경연이 한두 차례 방어전을 가지면서 전력을 보강 한 후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에서 WBC 스트로급 1위인 탑독의 위치에서 경기장소를 홈링으로 유치해 메이저 타이틀에 도전했다면, 그의 복싱 역사에 지각변동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려운 전투에서의 승리는 달콤하지만 그는 잘함과 뛰어남의 경계에서 안타깝게도 신의 외면을 받았다. 불과 5개월 전 세계 정상에 등극해 울려 퍼지던 환호의 박수가 잠깐 사이에 차디찬 냉소와 모멸로 변하는 걸 피부로 느끼면서 전열을 추스린 이경연은, 89년 1월 나파 카트완차이와의 WBC 스트로급 타이틀을 앞두고 일전을 준비했지만 시집가는 날 등창난다고 뜻하지 않게 손목 부상을 당해 결국 타이틀 도전은 돌고 돌아 최점환에게 기회가 돌아갔고 89년 11월 벌어진 타이틀전에서 최점환은 챔피언 카트완차이에 12회 KO승을 거두며 정상에 올랐다. 이후 이경연은 89년부터 91년까지 지루한 전초전만 거푸 치르며 21전 20승 (8KO승) 1패를 기록했고 마침내 그에게 오랜 기다림 끝에 모처럼 가뭄에 단비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타이틀전 을 치루는 이경연(좌측)과 이오까

그것도 홈링에서...하지만 상대는 강해도 너무 강한 28전 28승(21KO승)을 기록한 WBC 스트로급 챔피언 리카르도 로페즈(멕시코)였다. 1991년 12월 22일 SBS 방송국 개국 기념으로 인천 실내체육관에서 문성길 VS 톨삭 옹삭파, 이경연 VS 리카르도 로페즈의 양대 타이틀 매치가 벌어졌다. 이 경기는 국내 프로복싱 사상 2번째로 벌어지는 더블 이벤트였다. 복싱계 살아있는 전설 리카르도 로페즈의 연습 장면을 지켜본 필자는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완벽한 테크닉과 송곳처럼 쑤시는 어퍼 커트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90년 10월 일본에서 오하시 히데유끼를 마치 어린애 손목 비틀 듯이 5회 TKO로 물리치고 챔피언에 올라 지난 5월 1차 방어전에서 일본의 히라노 기미오를 맞이해 8회 TKO승을 거두고 이경연을 상대로 2차 방어전을 치르는 멕시코의 소형폭탄이라 불리던 그는 70년대 전율의 강타자 카를로스 자라테의 재래(在來)라 불릴 정도로 아마추어 멕시코 국가대표 출신답게 퍼펙트한 복서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같은 시간대에 운동했던 문성길과 이경연의 트레이닝 현장에 매니저인 김철호와 트레이너 이영래의 시선은 온통 필승조인 문성길의 트레이닝에 집중되어 있었다. 문성길의 미트를 잡는 필자의 시선에 이경연의 쉐도우 복싱을 하는 모습과 문성길의 훈련에 포커스를 맞추고 주시하는 이영래, 김철호가 포착됐다. 어느 철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확언하노니 인간은 간사한 동물이다. 

91년 12월 5차방어전을 치루는 문성길(좌측)과 필자

링에 올라간 이경연은 소문대로 대단한 파괴력을 보유한 그의 강타를 한 대씩 맞을 때마다 주저 앉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데미지를 입었지만 굴복치 않고 상상을 초월한 전투력을 발휘해 로페즈의 강타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정신력으로 마지막까지 선전분투하며 판정까지 끌고 가는 대단한 승부사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승패를 떠나 박수를 쳐주고 싶은 대목이다. 로페즈는 이후 2번의 통합 타이틀전을 포함 미니멈급에서 몬티엘, 사만 소루자 투롱, 로젠도 알바레스, 루카스, 알렉스 산체스 등을 제압하며 통산 22차 방어에 성공했고 한 체급 월장해 IBF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미국의 윌 그릭시비를 12회 판정으로 잡고 2체급을 석권한 후 58승(38KO승) 1무를 기록하고 링을 떠났고 불멸의 복서인 그는  한국 복서와 3차례 대결 중 이경연만 판정으로 잡았을 뿐 오광수(풍산체)와 박명섭(강산체)을 9회와 1회 KO로 제압한 특급 챔피언 이었다. WBC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 돌주먹 문성길은 14승(10KO승)1패를 기록한 동급8위 톨삭 옹삭파를 맞이하여 벌인 5차 방어전에서 6회 KO승을 거두며 3차 방어 포드전, 4차 방어 코나두 전에 이어 3연속 KO승으로 타이틀 5차 방어에 성공했는데 마침 22일밤 그날은 태국 방콕에서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리카르도. 로페즈와 타이틀전을 벌이는 이경연(우측)

태국의 스몰 타이슨 카오사이 갤럭시가 19차 방어(16KO승)를 멋있게 장식하고 WBA jr 밴텀급 타이틀을 반납해 은퇴한 날이었다. 이경연은 그 경기가 사실상 은퇴경기였고 88프로모션 최고의 히트상품 문성길은 5차 방어후 93년 11월 13일 10차 방어에 실패하면서 벨트를 풀면서 이듬해 88프로모션이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는 단초(湍初)를 제공했다. 세월이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고 그 흘러가는 강물처럼 곁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간다. 세월은 말이 없고 추억만 남은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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