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블라인드 앱에,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제가 꼬리를 쳤다고.."

2021. 1. 1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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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의 예민한 상담소 2] 아홉 번째 이야기
[이은의 변호사(ppjasmine@nate.com)]
"회식이 끝나고 친한 몇몇이 술을 한 잔 더 하게 되었는데 평소보다 많이 취했어요. 정신을 차렸을 땐 모텔이었어요. 누군가 몸을 더듬어서 깼고, 뿌리쳤는데 계속 만졌어요. 비명을 계속 지르니까 멈췄습니다. 가해자는 같은 부서 과장님이었어요. 제 마지막 기억으로는 가해자는 술자리에 없었어요. 공식적인 회식이 끝난 후 가해자가 제게 잘 들어갔냐고 톡을 보냈길래 모여있는 장소를 알려줬는데, 아마 그 후 합류했나 봐요. 나중에 다른 부서원에게 들은 바로는 집 방향이 같으니 데려다준다면서 저를 부축해서 갔다고 했어요. 가해자는 처벌도 받았고 회사에서 징계도 받았어요. 그런데 회사 블라인드 앱에 제가 꼬리를 쳤고 부축했을 때 제가 몸을 비비적거리며 추행을 했다고 소문을 내더니, 급기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올렸어요."

조직내 성폭력 피해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후유증을 남기는 것은 성폭력만이 아니다. 원래의 사건이 가해자의 잘못으로 분명하게 결론 내려진 사건에서도, 2차 피해로 인해 눈물 흘리는 피해자들이 적지 않다. 2차 가해는 가해자가 적극적으로 가담할수록 극심해진다. 한국은 피해자가 입은 명예훼손에 대한 위자료가 피해 대비 턱없이 낮다. 피해자가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지만, 그 나쁜 소문의 시작점에 대해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2차 가해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에 나서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렇게 못된 해코지를 속수무책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런 2차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갖는 현실적인 문제점은 비단 송무에 들어가는 비용이나 증거만이 아니다. 다양한 정보가 공유되는 인터넷 시대에, 정당한 방어권이나 표현의 자유란 미명 하에 가해 방법도 다양하고 범죄성립이 되지 않게 빠져나가는 경우도 많다. 특히 학교나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자유롭게 토로하도록 만들어진 익명게시판, 소위 '블라인드 앱'이나 조치가 필요한 억울한 사연 등을 수렴하고자 만들어진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가 갖는 폐해는 상당하다.

우선 블라인드 앱의 경우, 조직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눈엔 그 정도로는 피해자가 특정되거나 사실적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기 쉽다. 그런데 조직 내부에는 피해자의 주변이든 가해자의 주변이든 혹은 인사 관련자들이라도 몇몇이나마 피해 관련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들이 정확하게 사실대로 알고 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블라인드 앱에 가해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올린 글은 가해자가 의도하는 방향대로 보는 이들에게 의혹을 만들고 말을 만들어내기 일쑤다. 그리고 재생산된 말들은 처음보다 방대한 범위에서 회자된다. 피해를 입었어도 피해자의 학업이나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 쑤군거림을 견뎌내는 시간 동안 피해자의 마음엔 멍이 들고 평판엔 금이 간다. 그런데 피해자가 경찰서에 가서 회사 블라인드 앱에 이런 글이 올라왔는데 가해자를 처벌해달라고 하면, 이게 가해자가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질문받게 된다. 그리고 이 글만으로는 사실적시에 해당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들도 수없이 듣게 된다.

그럼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는 어떨까. 누군가는 정말 억울하고 부조리한 상황을 타계해보려는 의지로 글을 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 사이트를 비롯하여 이런 종류의 사이트들에는 애꿎은 타인을 비방하고 폄훼하기 위해 의혹이나 의심 등과 같은 단어들로 포장한 글들도 상당하다. 언뜻 보면 마치 필요한 사실을 폭로하거나 고발하는 양 굴고 있지만, 일단 누군가를 끌어내리고 흠집 내고 보겠다는 심보로 쓴 글이 난무하다. 문제는 이런 글 중 상당수가 피해자나 가해자 주변에서 보면 누구를 의미하는지 특정되는 일들이 많고, 개중에는 오해를 낳기도 한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도 믿지 않는 글 앞에서도 자신이 그렇게 여겨질 것이라는 절망감을 갖게 된다. 글 삭제나 비공개를 요청하는 과정도 답답하긴 매한가지다. 판결 등으로 확인 서류를 보내달라는 뻔한 소리가 돌아오기 일쑤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이렇게 합법적으로 마련된 절차나 장치를 악용한 피해일수록 해결하기가 녹록지 않다. 고소를 한다고 그런 행위를 멈추도록 강제할 방법이 없다. 피해가 소명돼서 처벌로 이어지든 배상 판결이 나든 하면 다행이지만, 이마저도 알량한 '표현의 자유'니 사실이라고 믿었을만한 사정 같은 가해자 중심적 시선에 의해 안 되는 일들도 허다하다. 소명이 되었을 무렵엔, 이미 씻기 어려운 추문 속에 피해자에게는 낙인이 찍히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그냥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해자가 하는 2차 가해에 일일이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가해자가 저지르는 행위들에 대한 증거들을 차분히 수집하는 것이 필요하다. 증거들이 누적될수록 처벌의 수위도 올라가겠지만, 행위자가 누구인지 합리적으로 추단되기도 하고 사실 적시 여부도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처벌의 수위가 올라간 상태에서 고소가 들어가면, 그게 가장 유효한 피해 억제책으로 작용하게 된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섣부르게 일일이 반응하는 건 자칫 가해자가 의도한 추문을 가속시킬 수 있다. 당초 말이란 나쁘고 요사스러울수록 그럴듯해 보이기 마련이고, 피해자의 말이 가해자의 말보다 자극적일 리 만무하다. 그러니 피해자가 입장을 표명하고자 한다면 감정을 빼고 강력하고 분명하게 입장을 밝히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이은의 변호사의 칼럼 '이변의 예민한 상담소'가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일상생활 속 성희롱·성폭력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언제든, 어떤 사연이든 언니에게 털어놔!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은의 변호사 메일(ppjasmine@nate.com)로 보내주세요.

[이은의 변호사(ppjasmine@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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