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DJ 대신 플레이리스트

신예슬 음악평론가 2021. 1. 1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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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안, 지금 나오는 노래가 좋아서 네가 하는 얘기에 집중을 못했어” “오늘은 그냥 뒹굴거리면 안 될까” “민수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지독하게 우울한 날이었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꼭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한 말이나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 혹은 일기장 속 한 구절처럼 보이는 이들은 최근 유튜브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은 ‘플레이리스트’들의 제목이다. 오늘의 날씨나 계절, 기분을 설정하고 그때 듣기 좋은 음악을 모아놓은 이 상황 저격형 플레이리스트는 짧게는 30분부터 길게는 5시간에 육박한다. 24시간 내내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지속되는 라디오 형태도 있지만 보통은 한 시간가량의 플레이리스트가 가장 많다.

서로 다른 음악을 모아 한 시간을 꾸미는 일은 주로 ‘믹스’를 만들던 DJ의 일이었다. 하지만 편집 툴이 간편해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신보가 나오다 보니 이 수많은 재료를 조합해서 긴 흐름을 만드는 일은 전문 음악인의 작업만이 아니게 됐다. DJ의 믹스가 당대적 조건을 반영하는 한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동안, 흐름에 맞춰 취향껏 음악을 선곡하는 초기 형태의 DJ가 플레이리스트라는 이름을 내걸고 되돌아온 것 같기도 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서 텍스트나 시각 콘텐츠를 공유하긴 쉬웠지만 음악 취향을 내보이긴 어려웠다. 싸이월드의 폐장 이후 조금은 시들해진 음악 취향 공유의 장이 마침내 플레이리스트라는 새 거처를 찾은 듯도 하다. 수많은 ‘음악 맛집’에서 유저들은 제작자에게 찬사를 보내고 또 다른 리스트를 요청하기도 한다. 제목이 건넨 농담을 받아치는 댓글을 읽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다. 유튜브 저작권 필터링을 통해 자동으로 원저작자에게 수익이 돌아가다 보니 플레이리스트가 그 자체로 수익을 내진 않는다. 몇몇 인터뷰를 보면 개인 제작자들은 순수한 즐거움이나 취미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듯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링크 안에서 사람들은 취향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어떤 음악이 만들어지냐는 것뿐만 아니라 음악을 ‘어떻게 골라 들을 것이냐’는 문제도 음악문화의 중요한 축 중 하나다. 다음 곡을 랜덤하게 골라주는 셔플 기능은 음반 트랙을 차례대로 듣는 선형적 청취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청취기록을 분석해 음악을 제안하는 알고리즘 추천은 아주 새로운 음악을 소개해주진 않았고 때론 그 안에 갇히는 느낌마저 줬지만, 그래도 취향을 단단히 다질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지금 이 플레이리스트의 시대에서는 누군가의 ‘큐레이션’이 각광받고 있다.

물론 ‘베스트 오브 ○○○’나 ‘금주의 탑 ○○○’처럼 고전적인 리스트도 여전히 생성되고, 아티스트 홍보용으로 만들어진 리스트도 있지만 여러모로 눈길을 끄는 것은 ‘삶의 OST’를 자처하는 플레이리스트다. 내가 생각하는 플레이리스트의 핵심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들은 무미건조했던 순간을 근사하게 바꾸어내고, 어려운 시간을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보낼 수 있도록 돕는다.

음악가만큼 음악 큐레이터가 각광받기 시작한 이 시대를 바라보며 세상에 음악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다시 실감한다. 삶의 순간을 윤택하게 만드는 플레이리스트들을 나도 즐겨 듣지만, 가끔 이 매끈한 흐름 바깥의 영역을 상상해본다. 플레이리스트에는 예상치 못한 의외의 포인트가 있지만, 결코 전체적인 흐름을 깨지는 않는다. 주기적으로 음악이 바뀌니 지루하지는 않지만, 거슬리지도 않는다. 낯선 소리가 가득한 음악은 지금의 플레이리스트들에서 찾기 어렵다. 시간이 지나면 일상화되지 못했던 낯선 음악도 플레이리스트라는 형식을 통해 삶 속에 진입하게 될까. 그런 음악이 가득한 리스트가 등장한다면 그건 내 일상과 과연 어떻게 호응할까. 이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일하면서 듣기 좋은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헤맨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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