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 성공한 펑위샹 "황제놀음 푸이, 20분 내에 내쫓아라"
일본이 펑 베이징정변 사주설
일 혐오주의자 우페이푸 제거
장쭤린에 굴복하고 하야한 펑
국민당 입당한 다음날 소련행
냉대받다 돌아와 북벌에 참여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0〉
장쭤린, 일 대리인 역할하며 내실 다져
일본은 정변을 획책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는 동북(東北)의 이권을 놓고 충돌했다. 승리자 일본은 10년간 동북의 정치, 경제, 문화 침투에 열을 올렸다.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굴기도 주목했다. 1918년 장이 동북을 통일하자 지지를 결정했다. 장은 한동안 일본의 대리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내실을 다졌다.
일본의 야욕은 동북에 그치지 않았다. 관(산하이관)내로 눈길을 돌렸다. 관내 최대의 실력자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는 죽는 날까지 일본 혐오가 극에 달했다. 청년 시절 겪었던 청·일전쟁, 특히 갑오(甲午)년 해전 패배의 음영이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항일전쟁 초기 일본인 치과의사에게 독살당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은 우페이푸 제거에 착수했다. 우페이푸라면 이를 갈던 장쭤린을 중간에 내세웠다. “쑨원과 연합해라. 권좌에서 물러난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와 동맹을 맺어라.” 장이 솔깃할 내용이었다. 우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펑위샹 회유도 장에게 맡겼다. 장은 실속파였다. 무력통일을 달성할 기회였지만, 펑위샹 회유에 제 돈을 쓰지 않았다. 150만 위안(元)을 요구했다. 요시다 시게루는 일본이 운영하던 펑톈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장쭤린은 50만 위안만 펑위샹에게 보냈다. 나머지는 전투기 구입에 썼다.
정변에 성공한 펑위샹은 쯔진청(紫禁城)에서 작은 조정 운영하던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부의)를 정리했다. “혁명으로 공화제를 선포한 지 13년이 지났다. 아직도 황제라는 폐물이 2000여 명 거느리며 황제놀이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쯔진청에는 200여 년간 긁어모은 문화재가 쌓여있다. 반출 못 하도록 20분 안에 내쫓아라.” 일본은 평민으로 추락한 푸이를 톈진의 일본 조계로 빼돌려 애지중지했다. 훗날 쓸모가 있었다.
소련은 우페이푸가 몰락하자 중국공산당과 합작을 전제로 쑨원과 손을 잡았다. 일본도 펑위샹이 쑨원의 열렬한 지지자인 것을 간과했다. 펑이 정변 동지쑨위에(孫岳·손악), 후징이(胡景翼·호경익)와 연명으로 광저우(廣州)에 있는 쑨원에게 국정을 맡기겠다는 초청장을 보내자 당황했다.
펑위샹, 레닌·트로츠키와 만남도 형식적
소련은 펑위샹과 선을 그었다. 레닌과 트로츠키와의 만남도 형식에 불과했다. 거처와 음식도 수준에 맞지 않았다. 검소함이 몸에 밴 펑위샹은 만족했다. 7년 예정이던 소련 체류는 위유런(于右任·우우임)의 귀국 종용으로 3개월에 그쳤다.
중국으로 돌아온 펑위샹은 사람이 달라졌다. 국·공합작으로 전개 중인 국민혁명(북벌) 참여를 선언했다. 우위안(五原)에서 역사적인 의식을 열었다. 부하들 앞에서 개인의 공과(功過)를 회상하며 선서했다. “국민당의 이념으로 민중을 환기하고, 매국 군벌과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중국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공동 분투하며, 삶과 죽음을 함께하겠다.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을 선서한다.” 위유런과 함께 홍기를 땅에 박았다.
펑위샹은 북양군벌과 완전히 결별했다. 소식을 들은 장쭤린은 “뭐 저런 놈이 다 있느냐”며 마시던 찻잔을 패대기쳤다. 새로운 드라마가 펼쳐질 징조였다. 〈계속〉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