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나고, 먹고는 싶고.."슬플 땐 리어카 떡볶이가 최고"
재벌 총수, 미술관 관장도 즐기는
전국 8도 떡볶이 레시피 소개
남친과 헤어진 후 울며 먹기도
이런저런 사연 많은 '소울 푸드'
맛에 정해진 표준은 없지만
4인분 이상 오래 끓여야 제맛
요리연구가 홍신애(45)씨의 떡볶이 역사는 이 질문에서 시작됐다. 50원짜리 컵떡볶이 하나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던 유치원생에게 불만은 딱 하나였다. “불량식품 사 먹으면 안 된다”며 엄마가 집에서 만들어준 떡볶이는 집 앞 슈퍼마켓 떡볶이보다 맛이 없었다.
“하루는 슈퍼마켓 아줌마가 만드는 과정을 지켜봤죠. 비결은 오뎅(어묵) 국물이었어요. 하루 종일 뭉근하게 끓인 국물을 팬에 붓고 오래 졸이니까 짭짤하면서도 단맛이 나더라고요.”
집에 있던 양은 냄비에 오뎅 국물을 사갖고 오던 날, 언덕길에서 넘어져 다리에 큰 화상을 입었다. 홍씨는 “평생 요리를 하며 살아야 할 운명의 첫 단추가 그때 끼워진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그룹 총수, 미술관 관장님도 제가 서비스를 대접하겠다고 하면 늘 떡볶이를 주문하세요. 세상의 좋은 음식은 다 먹어본 분들이 진짜 편한 자리에선 떡볶이부터 떠올리는 걸 보면 왜 떡볶이가 소울(soul) 푸드인지 알 것도 같아요.”
#홍씨는 최근 요리책 『모두의 떡볶이』를 냈다. ‘학교 앞 떡볶이’ ‘로제 소스 떡볶이’ ‘채끝 등심 짜파구리 떡볶이’ ‘LA갈비구이 절편 떡볶이’ ‘부대찌개 떡볶이’ ‘곤약 떡볶이’ 등 40여 종의 레시피를 담았다.
‘오뎅 국물의 비법’을 깨닫게 해준 근대화 슈퍼마켓의 떡볶이부터 경기여고 시절 친구들과 무한정 수다를 떨던 학교 앞 떡볶이, 미국 유학 시절인 신혼 때 집에서 직접 만들어 본 쌀 떡볶이, 한창 바빴던 30대에 밥보다 더 많이 먹었던 ‘오떡순’ 할머니 떡볶이 등의 이야기가 눈물 한 스푼, 웃음 한 스푼으로 버무려져 있다.
“떡볶이 맛에는 표준이 없는 것 같아요. 각자 인생의 어떤 찰나에서 혀로, 눈으로, 머리로 기억하는 맛이 다 다르니까요. 제 기억 속 가장 맛있는 떡볶이들은 힘들 때 위로가 됐던 맛이에요.”
“그때 알았죠. 슬플 때 리어카 떡볶이만큼 좋은 음식이 없다는 걸 말이죠. 주인아주머니는 손님 상대하느라 정신없고, 옆에 나란히 선 손님들은 자기 접시 보느라 옆자리 처녀는 노 관심. 사방이 트인 외부 공간이라 훌쩍이는 소리는 묻히고, 떡볶이 맛에 홀린 간사한 혀 덕분에 울적함 따위는 금세 잊게 되니 이런 명약이 따로 없더라고요. 하하하.”
“여기선 주문하면 꼭 ‘업소야? 일반이야?’ 물어봐요. 주변 유흥시설에서 주문한 뒤 손님에게 되파는데, 업소용이라고 하면 양은 넉넉히 담아주되 가격을 좀 비싸게 받아요. 누구랑 말도 섞기 싫을 만큼 울적한 날이라도 여길 찾아가면 ‘업소야? 일반이야?’ 질문에 대답할 수밖에 없어요. ‘아저씨, 전 일반인데요, 떡볶이는 8줄만 주시고 나머지는 어묵으로 채워주세요’ 눈물 그렁그렁한 채로 또박또박 주문하다 보면 어느 순간 픽 웃음이 터지면서 고민 따위는 털어버리자 마음먹게 되더라고요.”
#전국의 이름난 집은 꼭 찾아가 본다는 매니어답게 마지막 챕터는 ‘전국 8도 떡볶이 모음’으로 구성했다. ‘대구 할머니 후추 떡볶이’ ‘부산 깡통시장 빨간 떡볶이’ ‘춘천 닭갈비 떡볶이’ 등이다. 그 지역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 만한 집들인데, 책에는 상호명이 불분명하다. 그 집 비법을 전수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며느리에게도 안 가르쳐주는 비법을 제게 가르쳐줄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직접 먹어 보고 그 맛과 비슷하게 레시피를 만들었어요. 덕분에 요즘 독자들과 SNS로 소통하는 재미가 쏠쏠해요. 나름대로 터득한 비법들을 제게 알려주시더라고요. 하하.”
국가무형문화재 38호인 ‘조선왕조 궁중음식’의 대가 한복려 선생이 낸 책 『조선왕조 궁중음식』에는 흰 떡을 간장과 참기름 양념으로 버무린 ‘궁중떡볶이’가 소개돼 있다. 하지만 고추장·고춧가루를 이용하는 지금의 ‘빨간 떡볶이’는 언제 시작됐는지 다른 책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원조를 알 수는 없지만 시작은 상업용이었을 것 같아요. 재료 값 싸고, 계절에 상관없고, 같은 판에 계속 끓여가며 팔 수 있는 장점이 딱 길거리 음식에 알맞잖아요. 온 국민의 소울 푸드로 기억되는 이유도 비슷해요. 코흘리개 어린아이도 자기 돈과 의지로 맛있는 집을 선택할 수 있으니까 그 시간만큼 쌓인 기억도 많겠죠.”
홍씨가 빨간 떡볶이의 시작을 상업용 리어카로 보는 이유는 또 있다. 철저히 시간과 양에 비례하는 맛 때문이다. “떡볶이·미역국·카레·곰탕은 무조건 4인 이상 분량으로 오래 끓여야 제맛이 우러나요. 이번 책에서 제일 신경 쓴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에요. 집에서도 길거리 리어카에서처럼 다량으로 만들 듯 양념 비율을 세게 했죠.”
서정민 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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