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하고 애매한..예능 속 '장애 희화화' [이진송의 아니 근데]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2021. 1. 1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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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알아듣는 상황이 마냥 웃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

[경향신문]

김종민이 스스로 ‘난청이라는 아픔을 웃음으로 승화’했다고 한들, 타인의 약점을 웃음거리로 삼은 방송 환경이나 제작진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위 사진은 김종민이 되묻는 장면이 자주 부각된 MBC <놀면 뭐 하니?>, 아래 사진은 <가족 오락관>의 간판 코너 ‘고요 속의 외침’을 부활시킨 <신서유기>의 한 장면.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귀가 좀 어두웠다. 종종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말을 이상하게 알아들어서 우리 가족뿐 아니라 친척까지 공유하는 일화를 만들었다. 어느 날, 아버지의 병원 진료에 동행했다. 청력이 떨어진다는 의사의 말에 아버지는 젊은 시절 일했던 공장의 소음이 굉장히 심했으며 그때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아버지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점을 한 번도 청력 손상이나 청각장애의 관점에서 생각지 못했다. 인권 교육 물(?) 좀 먹었다고 자부하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아버지를 놀렸던 나는… ‘고요 속의 외침’을 보며 자란 <가족 오락관> 키즈였다.

‘고요 속의 외침’은 1985년부터 2003년까지 방영된 KBS 예능프로그램 <가족 오락관>의 간판 코너였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헤드폰을 쓰고 옆 사람이 말한 글자를 전달하는 게임으로, 14년간 장수했다. 이 코너의 오락 요소는 잘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전달 단어가 기상천외한 단어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다. 전달하는 사람은 필사적이지만, 헤드폰을 쓰지 않은 사람들은 포복절도한다. 이 게임은 알음알음 명맥을 이어가다가 tvN 예능 <신서유기>에서 부활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적은 준비물로 ‘확실한’ 웃음이 보장되니 온갖 프로그램과 디지털 콘텐츠에 등장하고, <가족 오락관>의 게임 장면을 매주 업로드하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게임이 끝나면 사람들은 원래 주어진 단어를 확인하고 어이없어 하며 웃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게임이 아닌 일상이라면? 기껏 해독하고 전달한 단어가 틀렸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웃거나 짜증을 내는데, 원래 의미를 가르쳐주지도 않은 채 넘어간다면? 방송이 ‘잘 못 알아듣는다’=‘웃기다, 놀려도 된다’의 도식을 만들어 놓고 헤드폰을 벗고 빠져나가면, 한 번에 명쾌하게 알아듣기 힘든 세계가 현실인 사람은?

“네? 네?” 어리둥절한 김종민이
마냥 웃음 포인트로 느껴지는 건
난청 사실이 잘 안알려졌기 때문
‘기봉이’ 흉내·촉감으로 맞추기 등
아무렇지 않게 웃기게만 느꼈다면
비장애인이란 특권을 가졌기 때문
‘재미의 기준’을 다시 생각해보자

얼마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하다 가수 겸 예능인 김종민의 난청(청각이 저하 또는 상실된 상태) 사실을 알았다. 찾아보니, 김종민은 여러 방송에서 어린 시절 겪었던 옥상 추락 사고와 학창 시절 선배에게 당한 폭행으로 고막이 상했던 사건을 언급했다. 의료기관에서 사고로 인한 난청 및 언어 능력 저하를 판정받는 장면이 KBS2 <비타민>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김종민은 MBC <놀면 뭐 하니?>의 ‘환불 원정대’ 편에 매니저로 출연했는데, “네? 네?” 하고 되묻거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이 재조명되었다. 이 무렵(2020년 9월)에도 김종민의 난청 사실은 몇 차례 기사화되었으나, 프로그램의 화제성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캐릭터가 중요한 예능에서 김종민은 오랫동안 엉뚱한 이미지로 통했다. 2003년 <실제상황 토요일>(SBS)부터, <1박2일>(KBS), <범인은 바로 너!> 등 굵직한 예능에서 구축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놀면 뭐 하니?>에서 자신의 이미지는 ‘바보’라고 말하며 웃는다. 사실 그 방법뿐이기도 하다. 못 알아들었다고 정색하거나 놀리는 사람에게 웃는 것 이외의 반응, 이를테면 정색하거나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면 김종민은 방송계에서 빠르게 지워졌을 것이다. <놀면 뭐 하니?>에서 유재석은 “그 짧은 얘기도 잘 못하시네요?”라며 놀리고, 이효리는 기분 나쁜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좋다”고 말하며 웃는다. 어리둥절한 김종민의 표정과 시도 때도 없이 되묻는 모습은 ‘환불 원정대’ 방영 내내 기복 없는 웃음 포인트로 활용됐다. 어떤 기사처럼 김종민이 스스로 ‘아픔을 웃음으로 승화’했다고 한들, 타인의 약점을 웃음거리로 삼은 방송 환경이나 제작진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오래, 시청자에게 어떤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미디어가 장애인을 대상화하거나, 장애인의 특성만을 강조하여 납작하게 재현하는 것도 고질적인 문제다. 특히 시각·청각 장애 여성 인물을 그리는 방식을 논하자면 글 한 편을 새로 써야 한다. 제한된 지면의 특성상, 여기서는 ‘예능’의 ‘장애 희화화’로 범위를 좁혔다. 우리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어떤 취약함을 웃음으로 착취해도 된다고 ‘승인’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2018년 MBC <전지적 참견 시점>은 신현준이 ‘기봉이’ 흉내를 내고, 패널들이 이를 재미있어 하는 장면으로 ‘장애인 희화화’ 논란에 휩싸였다. 지적장애인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영화 <맨발의 기봉이>(2006)에 출연한 이후 기봉이 연기는 신현준의 오랜 개인기였다. 신현준은 어눌한 말투로 자신을 소개하고, 자막은 ‘현준의 넘치는 개그 열망’이라고 부연한다. 영화 속 기봉이는 그저 기봉이로 존재하며 기봉이가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기봉이와, 기봉이 흉내를 내는 신현준을 보며 웃는다. 방송에서 멍석을 깔아주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연예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얼굴 몰아주기 게임’도 비슷하다. 얼굴과 몸을 일그러뜨리는 것이 뇌성마비 장애인 비하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눈 감고 상자 속 물건 만져서 맞히기’ 또한, 평소에는 촉각으로 판단할 필요 없고 상자 속 물건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즐거운 게임이다. 소리 내는 웃음뿐 아니라 ‘흥미진진한 재미’로 장애를 소비한 경우로는, tvN 예능 <대탈출 2>(2019)도 있다. 정신병원을 무대 삼아 정신장애인을 두렵고 기괴한 존재로 연출했다가 비판받은 제작진은 사과문을 작성했다.

2019년 KBS 파일럿 프로그램 <스탠드업>에 출연한 한기명은 자신을 국내 최초 장애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흑인과 성소수자의 자조 개그를 예시로 들며 자신의 장애를 희화화하지만, 선을 분명히 한다. “비장애인이 장애를 소재로 코미디 하는 것을 봤다. 자기 스스로가 아닌 남을 웃음 대상으로 만드는 건 비하다.” 물론 시청자의 감수성이 높아진 만큼 명백한 장애 희화화나 비하는 감소했다(한참 뒤떨어지는 감각으로 비하 개그를 시도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지만,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문제는 ‘미묘’하고 ‘애매’할 때 발생한다. 희화화의 대상은 주로 ‘비가시적인’ 장애다. 특히 ‘정상’적인 범주에 걸쳐 청각장애, 언어장애, 지적장애. 예를 들면 김종민의 난청은 정상 범주보다 조금 낮은 정도이고 방송 활동이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조금 모자란 바보’ 정도로 뭉개며 마음 놓고 놀리는 경향이 있다. 정상성 담론에 갇힌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신체의 다양한 차이와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 또한 시설 등에 수용되거나 활동보조인이 동행하지 않는, 혼자서 일상생활이 가능한 장애인을 잘 상상하지 못한다. 장애인을 타자화하고 차별하는 시선만큼이나, 자신이 보기에 ‘충분히 장애인 같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 태도 역시 매우 폭력적이다.

타인의 취약한 점에 집중하고, 다그치고, 비웃고, 놀리는 것은 ‘왕따’ 문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에게는 잘 못 알아듣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연출하고 웃는 즐거움보다, 적절하게 대처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상대가 계속해서 “예?”라고 되묻는다면 정확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내가 생각지 못한 반응을 보이는 타인을 비웃거나 구박하는 대신, 나 역시 상대의 기준에 맞지 않음을 인지하고 그 간극을 좁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재미와 웃음은 문화적 코드다. 사회와 구성원들의 욕망이나 감수성을 반영한다. 가변적이고, 관습과 제도 속에서 다르게 작동한다. 외국어를 배울 때, 그 나라의 언어로 하는 코미디를 보며 웃는 것이 최후의 관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또한 웃음과 재미는 폭력적이거나 역사적이기도 하다. 인류는 다른 특성의 신체를 전시하고 놀이로 소비하는 ‘프릭쇼(freak show, 기형쇼라고도 번역된다)’를 즐겼고, 사격 연습 삼아 재미 삼아 새를 날려 보내고 쏴 죽였다. 1980년대의 한국에서는 얼굴에 시커먼 칠을 한 채 흑인을 희화화하는 ‘시커먼스’가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녀’라는 멸칭이 아무렇지 않게 예능에서 쓰였다. 지금 우리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재미의 기준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타인의 문제 제기를 예민하고 피곤한 것으로 몰아가기보다, 왜 나는 아무렇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누군가를 찌르는데 내 입에서는 술술 넘어가는 웃음의 달콤함. 그게 바로 정작 가진 자는 모른다는, 특권의 맛이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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