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삶에 건네는 '뜨끈한 위로' [책과 삶]

선명수 기자 입력 2021. 1. 15. 12:12 수정 2021. 1. 15.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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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완의 자세
김유담 지음
창비|192쪽|1만4000원

엄마는 ‘때밀이’다. 변두리 작은 동네의 재래시장 앞, 굴뚝이 삐죽 튀어나온 목욕탕의 이름이 ‘선녀탕’에서 ‘24시만수불가마사우나’가 될 때까지. 속옷을 작업복으로 걸치고 20년 넘게 일했다. 목욕탕 여자들은 엄마를 ‘때밀이’라고도, ‘어이, 여탕!’ 같은 말로 무례하게 부르기도 하지만 그에겐 자부심이 있다. 남의 때를 밀며 번 돈으로 딸을 명문여대 무용과에 입학시킨 것. 김유담의 소설 <이완의 자세>는 딸만 바라보고 살아온 여탕의 세신사 오혜자와 그런 엄마의 기대를 이뤄줄 수 없음을 아프게 인정하는 딸 유라의 이야기다.

“내가 태어난 이래 우리 모녀의 삶은 늘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하지만 동정받을 정도는 아니었고, 제자리를 지키면서 서로를 그럭저럭 지켜왔다.” 화자인 ‘유라’는 여탕에서 자랐다. 남편을 잃고 다단계 사기까지 당해 어린 딸과 세상 끄트머리로 내몰린 엄마는 연락을 끊은 시댁 식구들이 준 돈으로 선녀탕의 ‘때밀이’ 자리를 산다. 단칸방조차 없이 여탕 탈의실 옷장에 짐을 부리고, 어떻게든 유라만은 이 여탕의 세계를 빠져나가길 바라면서. 그렇게 두 모녀를 중심으로 ‘여탕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종종 공중목욕탕에서 우는 여자들을 본다. 유난히 세수를 오래 하는 여자들, 그들은 하얀 김이 서린 흐릿한 거울 앞에 웅크리고 앉아 물을 세게 틀어놓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 울음조차 빠르고 손쉽게 처리하는 여자들을 뒷모습만 보고도 알아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나, 그리고 우리 엄마와 닮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첫 소설집 <탬버린>으로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한 김유담이 새 소설 <이완의 자세>를 펴냈다. 여탕에서 삶을 꾸려나간 세신사 엄마와 성공해 그곳을 탈출하고 싶은 딸, 여탕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유쾌하고 따뜻한 필체로 그린다. 창비 제공
딸만 바라보며 사는 ‘때밀이’ 엄마
주인공이 되지 못한 ‘무용수’ 딸
성공하지 못하면 패배한 삶일까
여탕 사람들에게 작가는 말한다
인생은 길다고, 힘을 빼라고

작가는 여탕의 풍속도를 재치있고 능수능란하게 그려낸다. “목욕탕은 계급장을 떼고 알몸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지만, 이곳에서도 세속적인 위계는 있다. 자식의 성적이나 입시 관련 정보력, 재개발 예정지에 집이 있는지 따위가 서열을 만든다. 이곳에 출석 도장을 찍듯 드나드는 여자들은 엄마의 날씬하고 탄탄한 몸과 딸의 명문대 입학을 부러워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 엄마는 그저 남편 없는 ‘때밀이’일 뿐이다. 여탕 여자들 중 가장 카리스마 있는 ‘오회장’은 동네에서 수입상회를 운영하며 ‘회장님’으로 불리지만 ‘정상가족’에서 이탈했다는 점에서 은근한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탕 커뮤니티에서 입김이 센 인물이든, 싱글맘 때밀이든 삶의 고단함은 매한가지다. “울음조차 빠르고 손쉽게 처리하는 여자들”, “뜨거운 물에 몸을 불리고 때를 씻어낸 후에도 풀리지 않은 피로 때문에 누군가의 발밑에 깔려야 하는 여자들”이 매일 목욕탕에 온다. 그런가 하면 유라가 다니는 대학 무용과에는 대중목욕탕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동기들이 있다. 출신과 계급, 젠더가 가르는 미세한 권력관계를 예민하게 포착해온 김유담은 이 소설에서도 인물들이 처한 복잡다단한 삶의 자리를 깊이 응시한다.

엄마가 멸시와 하대를 견디며 번 돈, “도둑년 돈이든 갈보년 돈이든 들오기만 해라”라며 빳빳하게 다리미로 다린 돈으로 유라는 동네 ‘윤원장’에게 무용을 배우고 그가 짜준 승무로 콩쿠르에서 입상한다. 그 수상 경력으로 입학한 대학에선 단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다. 유라에겐 모녀가 처음 선녀탕에 왔을 무렵, 살기 위한 독기를 품은 엄마가 세신을 연습한다며 자신의 여린 몸을 이태리타월로 박박 밀어내던 기억이 여전히 울긋불긋한 상처로 남았다. “눈을 질끈 감고 어금니를 깨문 채로 추위와 아픔, 그리고 수치와 모멸감을 견뎠”던 아이는 몸에 닿는 타인의 무심한 손길에도 경직되고 움츠러드는 무용수가 된다. 결국 단 한 번도 무대 중앙에 서지 못한 채, 엄마와 목욕탕 사람들이 단체로 관람 온 졸업공연에서도 주역 ‘심청’이 아닌 해초나 선녀 같은 여러 배역을 맡아 바쁘게 움직인다. “주인공이 아닌 사람들,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은 버거울 정도로 여러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한때 야구 유망주였지만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목욕탕집 아들 만수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은 단 한명뿐”이고, “누구든 확률적으로는 조연이나 엑스트라에 머물 비율이 훨씬 더 높다는” 자명한 현실을 둘은 아프게 받아들인다.

‘내가 꿈꿔온 나’가 아니더라도
‘충분한 나’로 살 수 있는 낙관이
조금씩 ‘온전한 나’를 만들어간다

그렇기에 소설은 어떤 실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김유담은 ‘작가의 말’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가슴속 깊이 품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왔다”고 말한다.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삶에서 패배하지는 않은 인물들을 통해 소설은 몸에 힘을 빼는 ‘이완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탕으로 돌아온 유라는 “오늘 못하면 다음에 하면 돼. 인생은 지겹도록 기니까”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근다. 그리고 처음으로 몸을 천천히 풀어본다. “ ‘내가 꿈꿔온 나’가 아니더라도 ‘충분한 나’로 살 수 있을 거라는 낙관이 어쩌면 더 오래 쓰게 하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말처럼, 인물은 그렇게 조금씩 온전한 ‘나’에게로 다가서는 듯하다.

전작 <탬버린>에서 “탬버린을 흔들 때마다 징글징글징글” 울리는 삶의 짠내를 명랑하게 풀어낸 김유담은 이번 작품에선 욕탕의 후끈하고 따뜻한 열기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삶의 실패 앞에 나직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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