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60주년, 하춘화의 역사-리사이틀 여왕의 '예스터데이'

이승연 2021. 1. 15. 12:0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만 6세의 나이에 데뷔한 하춘화가 올해로 가수인생 60주년을 맞이했다. 총 140장의 앨범을 낸 그녀는 2500곡 발표, 8500회 이상의 공연을 한 것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며 한국 가요계의 여왕으로 자리매김했다. ‘예스터데이’에서는 하춘화의 데뷔부터 연애와 결혼, 그녀의 콘서트 전속 사회자였던 고(故) 이주일과의 추억, 그리고 그녀를 존경하는 깜짝 손님과의 인연 등을 공개했다.

▶#도전 60년

-하춘화 “제가 6살 때 데뷔한 걸 많은 분들이 모르고 계시더라고요. 제가 ‘올해로 (데뷔) 60주년이 됐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래, 하춘화가 언제적 하춘화야. 아마 나이가 70~80은 됐을 걸’이라고 이야기를 하세요(웃음).”

▶#주워온 아이

-하춘화 “저희 집안에 예능 쪽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없어요. 저만 유별나게 끼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동네에서는 ‘노래 잘하는 아이’가 아니라 ‘이상한 아이’로 불렸어요. 그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노래를 불렀으니까요. 동네에 중국집이 있었는데, 거기 주인아주머니가 공갈빵 같이 큰 빵이랑 대파를 춘장에 찍어먹더라고요. 그게 너무 먹고 싶어서 ‘아줌마 빵 좀 주세요’했더니 노래를 부르라고 했어요. 빵 먹을 생각에 창피함도 모르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 모습을 아버지가 보셨어요. 아버지께선 사업을 하느라 제가 노래에 소질이 있는 줄 모르셨는데,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셨어요. 이후 아버지가 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5살에 서울에 있는 동아예술학원에 입학을 시키셨어요.”

▶#하춘화 ‘찐팬’ #가수 겸 작곡가_이호섭

-이호섭 “하춘화 씨의 인생을 이야기하는데 제가 빠지면 서운하죠. 제가 중학생 때, 50년 전에 하춘화 씨를 너무 좋아했어요. 그때는 주간지를 통해서만 스타를 접할 수 있었어요. 잡지를 다 오려서 제 방에 붙여둬서 어머니한테 많이 혼도 났었어요. 오죽하면 ‘내가 나중에 하춘화 선생님하고 결혼을 해야겠다’라고 다짐을 했겠어요.”

-하춘화 “저는 작곡가로만 알고 있었어요. 방송에서는 노래강사로도 나오시더라고요. 그런데 처음에는 사실 비호감이었어요. 남자 목소리가 너무 ‘아~ 흥~’ 콧소리가 많이 나가지고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노래를 너무 잘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곡도 찾아보고 했는데 장르의 폭이 굉장히 넓었어요. 그래서 곡을 달라고 했어요.”

▶#이런 남자 처음이야

-하춘화 “저는 남편이랑 살면서 ‘뭐 이런 남자가 있지’라는 걸 수시로 느껴요. 굉장히 고지식해서 제가 농담을 해도 진담으로 받아들여요. 그래서 농담을 잘 못 하겠더라고요. 남편은 친언니의 친구분 소개로 만났어요. 남편은 K방송사에 다녔는데, 거기 사람들이 남편을 노총각 천연기념물로 불렀다고 해요. 너무 장가를 안 가서. 저희는 늦은 나이에 만났기 때문에 결혼을 전제로 만났어요. 당시 부모님께서 더 좋아하셔서, 제 마음이 동요가 많이 됐던 것 같아요. 사랑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난 사이에요(웃음). 그렇게 살다 보니 결혼 전과 후가 조금도 변한 게 없어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에요.”

-김재환 “서로 호칭은 어떻게 하세요?”

-하춘화 “저희는 ‘여보, 당신’을 못 해봤어요. 그렇게 말하는 게 쑥스러워서 저는 ‘여보쇼’라고 불러요. 제 휴대전화에는 남편이 ‘여보쇼’라고 저장되어 있는데, 남편은 저를 ‘하천사’로 저장해놨어요.”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하춘화 “이주일 씨는 준비된 코미디언이었어요. 제가 했던 8500회 공연 중에 7000회 이상은 이주일 씨와 함께 했어요. 전속 사회자로 있으면서 1년이면 180일 정도는 함께 공연을 했어요. 그 당시에 리사이틀 진행자는 곽규석 씨가 최고였는데, 너무 바빠서 지방 공연은 함께 할 수 없었어요. 지방 공연 사회자 모집을 했는데 이주일 씨가 온 거예요. 단장님은 ‘너무 못생겨서 안 되겠어’라고 하셨는데 제가 오디션은 한번 보자고 했어요. 대구 공연에 함께 간 게 인연이 돼서 저의 전속 사회자로 10년 동안 함께 했어요. 그 와중에 여러 가지 기쁘고 슬픈 일들을 많이 만났어요.”

-주현미 “제일 큰 사건이 있었죠.”

-하춘화 “1977년도 11월11일이에요. 날짜를 잊지 못해요. 그때 이리에 공연을 하러 갔는데, 화약을 실은 열차가 폭발해서 *이리시가 전부 날아간 사건이 있었어요. 제가 그때 삼남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역에서 거리가 불과 500m밖에 안될 정도로 가까웠어요. 그때 오프닝 끝나고 난로를 쬐고 있는데 갑자기 폭발이 일어난 거예요. 그 위력이 대단해서 땅이 흔들리고, 제가 순간적으로 땅에 파묻히는 느낌이 들면서 숨이 안 쉬어졌어요. ‘이렇게 죽는구나. 나는 여기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내가 죽던가 아니면 나 혼자서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만 들었어요. 여기저기서 신음소리도 들리고, 너무 무서웠어요. 그 순간 작은 목소리로 누군가 제 이름을 불렀어요. 그게 바로 이주일 씨였어요. 대기실이 2층이었는데, 이주일 씨의 도움을 받아서 1층으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주일 씨는 머리를 크게 다쳤더라고요. 그럼에도 그 아픔을 견디고 나를 구출해줬어요.”

-안재욱 “목숨도 살려주시고 인연이 많은데, 문득문득 생각나시죠?”

-하춘화 “그럼요. 일산에 암 센터가 있잖아요. 그곳에 계실 때 저한테 ‘내가 여기서 완쾌해서 나가면 예전처럼 공연을 하자’ 그러셨어요. 하루는 옆방에서 누가 있다가 나가고 그런데요. 돌아가시는 거죠. ‘이제는 내 차례 아니겠냐’라는 얘기도 하셨어요. 그러면 저는 ‘무슨 소리냐’ 하고 돌아섰는데, 그 후에 제가 지방공연을 갔을 때 돌아가셨어요. 너무 아깝게, 일찍 돌아가셨어요.”

*이리역 폭발사건 1977년 11월 11일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 이리역에서 발생한 대형 열차 폭발 사고로 사망자 59명, 부상자 1402명, 이재민 7800명 발생했다.

[글 이승연 기자 자료제공 MBN]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63호 (21.01.19)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티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