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괜찮은 사람이었어' 냉전시대 요원 입으로 전하는 작별인사 [전희상의 런던 책갈피]

전희상 경제학 박사 2021. 1. 1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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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물 대가의 마지막 작품

[경향신문]

존 르카레의
<현장을 누비는 요원>

지난해 12월 별세한 영국 작가 존 르카레는 60년 동안 25권의 첩보소설을 썼다. 출세작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비롯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나이트 매니저> <리틀 드러머 걸> 등은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되어 소설만큼이나 큰 인기를 끌었다. BBC에서 방영한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 감독이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르카레의 소설은 대부분 냉전시대 영국 MI6와 소련 KGB 사이의 치열한 첩보전을 배경으로 한다. 르카레는 20대 초반부터 정보기관 요원으로 일했기 때문에 정보원 포섭이나 공작원 접선 같은 구체적인 첩보활동에 대한 사실적이고 섬세한 묘사에 능하다. 여기에 더해 입체적으로 엮어 놓은 음모, 배신, 술수가 거듭되는 반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의 책을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내려놓기 어렵다.

하지만 르카레는 여느 첩보소설과는 달리 냉전을 선악의 틀에 담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 대부분은 국익을 위해 맹렬히 싸우는 애국자로 묘사된다. 동시에 그들은 그 과정에서 도덕과 의리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고 이것이 자신을 빠르게 좀먹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적국의 음모를 분쇄하고 총성 없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바쳐 지켜낸 조국의 어두운 이면에 절망해 희생 위에 세운 성취가 무엇인지 자문하며 천천히 자기파괴의 길로 들어선다. 르카레 소설의 종반부에는 이렇게 국가의 압도적인 힘과 대비되는 개인의 비극적 희생이 선명히 나타난다.

르카레의 마지막 소설 <현장을 누비는 요원>은 전작들과는 달리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시대를 무대로 한다. 이 책에는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부상 그리고 미국과 영국을 휩쓴 국수주의 경향에 대한 르카레의 비판적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트럼프는 푸틴의 변소를 청소해주고 있고, 존슨은 돼지같이 멍청하다며 노골적으로 조롱한다. 더 나아가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이 공모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공작을 수행한다는 소설적 설정을 사용하기까지 한다. 소설 주인공 내트는 이 국가기밀을 외국 정보기관에 누설한 젊은 공무원을 체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지만, 그를 MI6에 넘기는 대신 25년간 정보기관 요원으로 활동하며 익힌 첩보기법을 총동원해 해외로 도피시킨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 국가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불사해야 하는 것이 정보기관 요원의 책무라고 할 때 이 경우 국가 자신이 국가의 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르카레는 1년 전 인터뷰에서 차기작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차기작은 빛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현장을 누비는 요원>은 일종의 작별인사로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는 해외로 도피하는 젊은 공무원을 배웅하는 내트의 모습을 그린다. 냉전시대의 베테랑 정보기관 요원 내트는 그에게 ‘나도 괜찮은 사람이었어’라고 말을 건네고 싶어 하지만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것이 아마도 르카레가 자신의 세대를 대표해 새로운 세대에 남기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전희상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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