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네모

한겨레 2021. 1. 15.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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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손가락 소설]학원 선생인 예나와 동거하게 된 이유
'몰카'로 비밀번호 알아낸 남자의 침입 때문
하지만 예나가 진짜 두려워했던 건 다른 일
일러스트 백승영

사랑받는 존재에게만 더 많은 사랑스러움이 생겨나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으냐고 예나는 묻곤 했다.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6학년 쌍둥이는 보름에 한 번 새로 네일 케어를 받고 온다고 했다. 그 애들이 두 가지 색의 매니큐어를 번갈아 바른 손을 나란히 내밀 때, 한 아이의 새끼손톱에서 다른 아이의 엄지손톱으로 진달래색과 레몬색의 순서가 흐트러지지 않고 계속 이어질 때, 작고 가는 손들 앞에서는 도리 없이 웃음이 터진다고 했다. 3학년 원재는 맞벌이를 하는 부모 대신 할머니의 살뜰하고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아이가 입고 다니는 파란 줄무늬 셔츠는 자주 세탁해 색이 날랐을지언정 늘 칼라 끝까지 빳빳했다. 원재는 원비 결제일이면 흰 봉투에 담은 현금과 함께 과일 도시락을 가지고 왔다. 일회용 플라스틱 도시락에 담긴 색색의 과일을 받아 든 원장과 각 과목 담당 교사들은 무심히 원재의 등을 한 번 더 쓰다듬었다.

예나는 그 웃음과 토닥임이 아이들의 어딘가에 영원히 쌓인다고 믿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별것 아닌 이야기를 큰 소리로 말할 줄 아는 아이들, 무안한 상황에서도 해사하게 웃는 아이들, 모르는 문제가 있을 때 거침없이 질문하는 아이들. 그런 사람은 일찌감치 정해지고 마는 거라고, 사랑은 집요한 깔때기처럼 더 많은 사랑스러움을 모은다고.

“글쎄, 그래도 결국에는 성정이랄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왜 있잖아. 늦게라도 착실하게 단단해지는 사람들이.”

내가 그 일에 대해 반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예나가 원하는 답이 이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또 혀를 차며 “역시 남자들은 공감 능력이 떨어져”라고 말할까 싶어 일순 긴장이 되었다.

나는 예나의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책상과 그보다 조금 작은 예나의 책상은 나란히 벽을 향해 놓여있었다. 거실 창으로 들어온 겨울 볕은 내 것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예나의 책상 위에서 모두 부서졌다. 예나는 상한 머리카락 끝부분을 쥐어뜯느라 가자미눈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나도 그 애들이 편하다는 거야. 먼저 다가오니까. 수업을 하다 좀 서먹하거나 하면 나도 모르게 그 애들을 찾는 거야, 줌으로 수업하면서도 걔네랑 눈을 맞추려고 한다니까.”

예나는 거북이처럼 목을 빼 모니터에 얼굴을 대고 두리번거리는 시늉을 했다. 컴퓨터에는 여전히 줌 프로그램이 켜져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회의 방을 빠져나간 뒤였고, 잔뜩 인상을 쓴 예나의 얼굴만이 커다랗게 비쳤다. 오후 세시였다.

그 계절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예나는 새로 발표된 방역지침에 따라 매번 바뀌는 일정에 끌려다녔다. 예나가 일하는 학원은 전체 온라인 수업을 시행했다가 학부모들의 원성에 필수과목인 영어와 수학만 대면 수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거리두기 지침대로 원내에선 한 번에 한 수업만 열 수 있었고, 학원 전체 스케줄이 재편되면서 예나가 맡은 국어 수업 시간도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러고도 원장은 온라인 수업은 집중도가 떨어지지 않겠냐며 당분간 아이들을 나눠 소규모 강의를 진행해달라고 했다. 같은 월급을 받고 더 훨씬 긴 시간 일하게 된 셈이었다.

“보너스라도 좀 달라고 어필해볼 수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물으면 예나는 장난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사교육 시장에서 국어 강사는 천민이야, 자기.”

예나에게는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 다른 이유도 많았다. 어쨌거나 출근은 하지 않고 집에서 일을 하니까, 그간 원생들이 많이 떨어져 나간 것이 왠지 자기 탓 같기도 하니까, 무엇보다도 곧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란 희망이 늘 잡힐 듯이 가까웠으니까.

예나는 등유 난로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혼자 집을 지키는 시간이 긴 내가 난방비를 줄여볼 요량으로 들여놓은 것이었다. 예나는 본래 세시부터 열시까지 학원에 머물렀고, 내 업무 시간 역시 대략 그랬다. 나는 인쇄소 몇 곳에서 디자인 외주를 받아 일했다. 주로 신장개업이나 배달 전단지, 청첩장, 동문회 행사 안내장, 정체를 알 수 없는 발명품의 카탈로그 따위를 만드는 업무였다. 가을이 될 무렵부터는 일이 점차 줄었다. 새로 일을 벌이고 무얼 찍어내 광고하려는 사람이 좀체 없는 모양이었다. 외주비가 줄어들자 난로를 켜두고 있는 것도 사치스럽게 느껴져서 예나가 없는 동안은 패딩을 입고 시간을 보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주택은 외풍이 강했다. 그녀는 타이레놀을 삼키고서도 난로 쪽으로 자주 손발을 뻗었다. 스테인리스 주전자며 보리차를 사 와 난로 위에서 물을 끓이기 시작한 것도 예나였다. 예나가 교재를 한 장씩 스캔하고 수업 자료를 만드는 동안 주전자에서는 고소한 물이 푹푹 끓었다.

우리가 같이 살기 시작한 것은 연애 3개월 차였다. 그즈음에 이미 매일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하고 있었다. 따져보니 예나와 나의 월세 만기일이 비슷하기도 했다. 그래도 살림을 합치는 건 좀 다른 얘기였다.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지만 관계에 확신을 가지기에는 일렀다. 표현에 거침이 없는 예나와는 다툼도 잦았다. 예나에게 그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쉽사리 동거를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를 만나기 전 예나의 집에 침입자가 있었다고 했다. 빈 담뱃갑에 몰래카메라를 숨겨 층계참에 놓아두고는 예나가 도어 록에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장면을 촬영해 갔다. 남자는 같은 방식으로 여러 집을 드나들다가 꼬리가 잡혔다. 예나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서야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나 혼자만 살고, 혼자만 들어가는 공간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거. 엄청 소름 끼쳤지.”

예나는 덤덤하게 회상했다. 비슷한 사건에 관한 기사를 본 듯도 했지만 가까운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시리도록 실감이 났다.

나로서 이상했던 점은 예나가 그 집에 계속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남자가 체포되어 형을 선고받았다고는 해도 섬뜩한 일이었다. 예나는 시기를 놓쳤어, 그러게, 그런데 이 동네도 월세가 많이 올랐대, 좀 알아보기는 했지, 하는 식으로 둘러대다가 화제를 돌렸다. 나는 다만 내가 예나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예나가 무서워하는 것은 집이나 침입자 그 자체가 아닌 다른 무엇이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덩치가 엄청나게 큰 남자애가 있어. 6학년인데 너보다도 더 커. 걔는 맨날 같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녀. 여름에는 윗옷만 반소매로 바뀌고 트레이닝복 바지는 똑같아. 회색 트레이닝복 세트. 걔는 학원도 잘 안 나와. 그런데 가끔 소름이 끼칠 때가 있어. 애들 연습 문제 풀라고 해놓고 나는 내 책상에 앉아서 해설지를 보거든. 나중에 설명을 해야 하니까 애들이 틀릴 것 같은 문제 위주로. 그러다가 고개를 들면 맨 뒷자리에 앉은 그 애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다리를 쩍 벌렸다가 천천히 오므리기를 반복하면서. 양손을 주머니에서 넣어 바지를 팽팽하게 만들거나 자기 허벅지를 만지기도 하고. 나는 그게 뭔지…잘 모르겠어.”

예나는 볼펜 끝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말끝을 길게 늘였다.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그 남자애는 더욱 잦게 결석을 한다고 했다. 예나는 아이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잘 되질 않자 이내 포기했다. 예나의 사랑의 깔때기 이론이 또 들어맞는 부분이었는데, 자주 먼저 상담을 요청하는 학부모들에겐 예나도 쉽게 연락을 했지만 그렇지 않은 부모에게는 굳이 전화를 걸지 않게 되는 모양이었다.

아이가 오랜만에 수업에 들어오는 날에도 예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평소였으면 아이들과 근황을 주고받고 농담을 하며 수업을 시작했을 예나는 옆에서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딱딱한 말투로 출석을 불렀다. 그러고는 다른 아이들에게 지난 수업 내용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너는 오지 않았잖아, 말하지 않고 질책하듯이. 아이는 카메라를 잘 켜지 않았다. 예나가 수업을 하다 문득 “거기 있니?” 하고 물으면 마이크만 켜진 작고 검은 네모 칸 속에서 네, 짧은 답이 울려 퍼졌다.

수업이 모두 끝난 저녁 예나는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내 책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말없이 내가 앉은 의자를 툭툭 쳤다. 나는 헤드폰을 벗고 예나 쪽으로 옮겨 앉았다. 예나가 바탕화면에 저장된 동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삼 분 남짓한 영상회의 녹화 본이었다. 예나가 동형어와 다의어의 개념에 관해 설명하는 동안 화면 구석의 네모 칸에서 문득 아이가 얼굴을 드러냈다. 예나가 말한 목이 늘어난 회색 트레이닝복 상의를 입고 있었다.

“이거 이상한 거 보는 거 아니야?”

예나가 아이의 안경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희뿌연 안경 위로는 컴퓨터 불빛이 반사되어 번쩍였고, 희미한 살구색의 둥근 형체 같은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로서는, 아니 누가 본다고 해도 그것은 그렇다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어려울 만큼 희미하고 짧은 잔상이었다. 그 뒤로도 아이는 멍하니 입을 조금 벌린 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예나의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본다면 그것이 무엇일지 아이의 표정만으로는 좀체 알기 어려웠다.

영상이 멈춘 뒤 예나는 답을 구하듯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좌에서 우로 돌려보았다.

“그러니까 맞아.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예나야. 저 나이 때 애들이 진짜 이상하기는 하거든. 그래도….”

내가 겨우 말을 이어나가는 동안 예나는 표정 없는 얼굴로 영상의 타임라인을 이리저리 옮기며 아이가 들어 있는 칸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샤워를 좀 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예나가 남겨둔 맥주 캔은 여전히 가득 찬 채였다.

그날 밤에는 눈이 내렸다. 첫눈치고는 대단한 기세였다. 안방에 난 창은 이중이기는 했지만 완전히 밀폐되지 않는 오래된 나무 새시였고 바람 새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예나가 자다 깨어나 온수 매트의 온도를 올리는 것을 기척으로만 알아차렸다. 내복과 잠옷을 껴입은 몸은 땀이 살짝 배어날 정도로 따뜻했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코끝과 정수리가 시렸다.

예나와는 그로부터 몇 계절이 더 흘러서야 헤어졌다. 그러나 당시에도 나는 언젠가 우리가 헤어지게 될 것임을, 그리고 이 일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될 것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나는 예나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해야 했다. 너무 노골적이 될까 봐, 기분 좋은 대화의 긴장감을 잃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았던 질문들이었다. 예컨대 너는 어떤 어린이었냐는 질문이나, 나는 어떤 애였을 것 같으냐는 질문, 그것도 아니라면 학원 일을 그만둔다면 무얼 하고 싶으냐는 질문을. 나는 언제고 적당한 기회가 있으리라 여겼다.

예나는 자신의 방에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지나간 일이 아니라, 그가 따로 예나의 방을 촬영한 영상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현재의 일을 두려워했다. 자신이 앉은 명확한 공간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 겁났다. 경찰은 남자의 컴퓨터에서 예나의 방 전경과 그녀의 여권을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다른 이들의 피해 사실 역시도 그런 식으로 밝혀졌다. 증거는 충분했고, 남자는 가택침입죄로 재판을 받았다. 예나가 삭제된 다른 증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우연히 디지털포렌식 전문가의 인터뷰를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층계참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할 수 있는 남자라면 예나의 방 안에도 설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발견되지 않은 외장 하드나 남자의 포렌식휴대전화, 혹은 클라우드나 어떤 사이트에도 영상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예나는 술에 취한 어느 밤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고 꼭 한 번뿐이었다. 나는 곧 그것을 잊었다.

예나가 어느 저녁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 것은 촬영 효과음 때문이었다. 아이의 마이크가 활성화 중이었다. 스크린 캡처를 하는 찰칵 소리가 여러 번 이어졌다. 예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카메라를 켜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잠시 뒤 한쪽 구석의 검은 네모가 아이의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득 찼다. 예나의 살기에 질린 채 나 역시 그쪽을 바라보았다. 살에 묻힌 다소 둔한 아이의 얼굴이 정지 화면인 듯 멈췄다. 예나는 뭘 한 거냐고 거듭 캐물었고 아이는 대답 없이 작은 눈을 끔벅였다. 다른 아이들도 놀란 듯 가만히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예나의 화면만이 그녀의 동작에 따라 빠르게 요동쳤다. 소리를 지르던 그녀가 제풀에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숨어있어야 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조심스레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고, 예나의 화면을 정지시켰다. 예나가 아이처럼 무릎을 끌어안고 엉엉 소리를 내 울기 시작했다.

정지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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