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싸운 페미니스트들의 고백적 투쟁기

한겨레 2021. 1. 1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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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대 페미니즘 운동가의 '상처와 치부까지 드러낸' 회고록
자신의 강간 피해와 조직 내부 갈등 극복하고 일궈낸 진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스트필리스 체슬러 지음, 박경선 옮김/바다출판사·1만8500원

“우리는 너무나 근사하게 ‘자매애는 힘이 세다’고 선언했지만, 사실 그런 자매애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서로에게 친절한 건 아니었다. 우리는 여성이고 페미니스트라면 다르게 행동하리라고 기대했지만,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늘 서로를 존중과 연민으로 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걸 1967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스트>는 2세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중 한 명인 필리스 체슬러의 회고록이다.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시작해, 페미니즘을 알기 전과 알게 된 뒤의 변화,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2세대 페미니즘이 부상한 상황, 페미니즘 진영 내부의 갈등 등을 다룬다. 회고록이니 당연한 말이지만 이 책은 반드시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데, 초중반과 후반부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배신자가 된다. 동지였기 때문에 배신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지만. 이것은 비단 페미니즘 진영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전선이 ‘바깥’에만 명확하게 있다면 좋겠지만 사람 수만큼의 전선이 내부에 만들어진다.

1972년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사무실에서. 오른쪽이 체슬러. 바다출판사 제공

1940년생인 필리스 체슬러는 보수적인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프가니스탄 남자와 결혼했다. 1961년에는 5개월간 카불에서 살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성별 분리, 여성 격리를 비롯해 조혼, 명예 살인 등을 접했다. 이 시기까지는 다른 페미니스트 없이 페미니즘적 가치를 내면화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일자리를 구하려고 할 때마다 숱하게 성추행을 당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저는 일자리를 원하는 거지, 연애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1960년대의 여성들이 간신히 성공이랄 것을 거머쥔다 해도 위태롭기는 매한가지였다. 모두 혼자 세상과 싸워야 했다. 체슬러는 일기에 적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남편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원한다.” 결혼을 두 번 하긴 했지만.

2세대 페미니스트는 이론을 만들면서 싸웠고, 진영 내부에서 싸웠다. 이 문제 중 상당수는 지금도 첨예한 갈등 중에 있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 개혁인가 혁명인가, 음란물을 포르노그래피로 볼 것인가 검열할 것인가, 성매매는 성을 파는 것인가 ‘성 노동자’가 될 수 있는 여성의 권리인가, 여성을 순진무구한 피해자로 볼 것인가 일의 행위자이자 책임 주체로 볼 것인가, 적(남자)과 동침하는 여자가 정말 페미니스트일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는 여전히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논쟁이 된다. 급진주의의 성격상 놀랄 일은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우리 2세대에게는 페미니스트 여성 선배들이 없었다. 어머니 또한 없었다. 우리에게는 오직 자매들뿐이었다.” 문제는 그런 이유로 앞세대가 했던 똑같은 갈등을 반복했다는 데 있다.

회고록답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스트>는 케이트 밀릿, 앤드리아 드워킨, 에리카 종, 수전 브라운밀러, 글로리아 스타이넘, 수전 손택 등 당대의 가장 유명한 여성들이 등장해 함께 싸우고 어울린 기록인 동시에 체슬러 자신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심리학자인 체슬러는 “여성을 어떤 식으로든 선천적으로 정신질환이 있는 존재로 간주하도록 배웠다”는 점에 의문을 던졌다. 심리학자 2천명이 모인 미국심리학회 연례회의에 참석해 연단에 오른 체슬러는 물었다. “여성을 대상으로 정신건강 검사를 한 뒤,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판정해 본 적이 있습니까? 강간피해자, 친족 성폭력 피해자, 구타당한 아내를 이해와 존중으로 대해 본 적이 있습니까?” 심리학계에서 체슬러의 노력은 강간 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고, 환자와 치료사 간 섹스를 고발했고, 정신병원에 감금된 아내들(“남편들은 새 여자가 생기면 아내를 정신과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 시점부터 아내들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약을 먹고, 폭식하고, 잠을 자지 못하던 이들은 머지않아 가혹한 정신의학적 진단 기준에 부합했다.”)에 대해 알렸다. 그리고 체슬러는 천재적인 여성 동지들을 얻었다. <성 정치학>을 쓴 케이트 밀릿의 이름은 가장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당시 유색인종 여성들이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았다는 한계 역시 빼놓지 않고 언급했다.

1988년 여성 재생산권 수호 운동 현장에서. (왼쪽에서 네번째가 체슬러) 바다출판사 제공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스트>의 ‘유엔에서 일어난 위력에 의한 성폭력’ 장에서부터는 체슬러 자신이 강간 피해자였던 경험과 그 이후 기대했던 연대를 얻지 못한 이야기를 썼다. 유엔 사무차장을 역임한 데이비드슨 니콜은 시에라리온 출신의 흑인 남성이었다. 그는 유엔의 후원으로 국제 페미니즘 콘퍼런스를 개최하자는 체슬러를 고용했다. “나는 흥분한 나머지 이렇게 힘 있는 남자가 왜 나 같은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를 도와주려 하는지 생각하지 못했다.” 고용계약서를 작성하고 나흘이 지나 니콜은 술에 취해 체슬러를 찾아와 강간했고, 이 사실을 폭로하려는 체슬러의 노력은 여러 국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체슬러는 특히 로빈 모건과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자신을 희생양 삼아 국제페미니즘네트워크를 장악하려 했다고 이 책에서 고발하고 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탈코르셋>을 쓴 이민경 작가는 뒤표지에 실린 추천사에 이렇게 적었다. “그의 회고록엔 걸출한 인물들이 연이어 나온다. 그러나 어쩐지 그가 드러내는 장면들은 하나같이 치부에 더 가깝다. 그러나 나는 되레 민망해지는 대신 이 무게감 있는 기록을 그저 유쾌하고 벅차게 읽었다.” 이 책의 중요성은 여기 있다. 체슬러는 실패를 포함해, 상처를 포함해 전부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 말하고 싶어한다. 자매애가 순수한 호의로만 이루어진 예쁘장한 케이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것은 페미니스트를 싸움에 준비시키는 책이다. 싸우라고 등 떠미는 책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면서 싸우는 방법에 대한, 먼저 겪은 자의 고백이다. “나는 지금 역사적인 영웅들에 대해 쓰고 있다. 그들을 규정하는 것은 그들이 해낸 일이지, 그들이 저질렀던 지독한 실수가 아니다.”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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