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김진철 입력 2021. 1. 15. 05:06 수정 2021. 1. 1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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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대망상 일본 들춰내 한국의 피해망상 극복하는 날카로운 분석
일본 지성의 증언 묶어 한일관계 미래와 과거사 극복 단초 제시

일본인들이 증언하는 한일역전이명찬 지음/서울셀렉션·2만2000원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가리키는 이 상투적 표현이, 이토록 맞춤한 때가 있었을까. 최근 몇년간 두 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짚어보면 그렇다. 박근혜 정부 때 갑작스레 이뤄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와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정부 성립 이후 강제징용을 둘러싼 갈등, 일본의 무역보복,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선언 뒤 보류 결정,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한-일 양국 정부의 서로 다른 대응….

일본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흔히 ‘혐한’으로 돌출되고, 이에 맞선 한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은 ‘반일’이다. 역사적 피해자의 가해자에 대한 ‘반일’은 납득되는 일면이 있으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혐한’의 시선을 멈추지 않는 데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묘하게 일그러진 감정의 연원을 <일본인들이 증언하는 한일역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우월의식의 또다른 이름으로 흔히 지목되는 열등감의 발로이다. 이 책에 따르면 패전을 종전으로 인식하는 일본 주류의 ‘정신승리’는 앞으로 더욱 커질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한국인이 똑같아질 필요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객관적 근거는 물론 핵심 논거를 이루는 일본 지식인들의 자성적 증언들은 큰 의미가 있을 뿐더러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제목이 피력하는 것처럼, 한국과 일본의 힘의 역전 과정에 주목한다. 코로나19 방역에서 한국이 일본과 견주지 않아도 성공적이었음은 딱히 거론할 필요도 없다. 경제적 측면의 한일 관계의 변화는 새삼 신선하게 제시된다. 무엇보다 근원은 정치다. 한국과 일본의 민주주의의 격차는 곧 두 나라가 왜 힘의 역전 상황에 이르게 됐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패전을 극복하지 못하고 과거에 사로잡혀 정체된 일본과, 식민과 개발독재를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에 매진하여 성과를 거둬온 한국의 차이가 두 나라의 극명히 다른 오늘을 만들었다.

일본의 정치 후퇴는 코로나19 대응 실패로 물러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정점을 찍었다. 무려 7년8개월간 이어온 아베 정권은 일본 역사상 가장 큰 오점으로 남게 됐다는 것이 이 책의 지적이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일본에선 ‘중합효소 연쇄반응 검사’(PCR)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며 방역행정이 사실상 붕괴했다. 아베가 총리 자격으로 주최한 ‘벚꽃을 보는 모임’의 초대자 명부는 폐기됐으며 사립학교법인의 특혜의혹이 잇따랐고 거대 광고기업 덴츠와 정권의 유착 구조도 드러났다. 일본 국민들은 법에 기초한 지배를 파괴한 정권임에도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이런 정권과 국민 자체가 일본이 패전 상황에서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일본 소장학자인 시라이 사토시 교토세이카대학 교수의 ‘영속패전론’을 소개한다.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전쟁이 끝난 것뿐이라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속임수를 일본인들이 받아들여온 것, 이러한 ‘눈물겨운 노력’이 아베 정권을 거쳐 코로나19 상황에서 여실히 무너져 내렸음을 이 책은 치밀하게 드러낸다.

일본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은, 일본 행정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극명히 드러냈다. 전근대적 관료시스템이 유지해온 칸막이 조직 문화와 상사에 순종적인 기질 등으로 이 시스템은 설명된다. 피시아르 검사를 그토록 아베 정권이 막아온 것은, 무엇보다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음은 이미 알려져 있다. 당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일과 도쿄 올림픽 개최라는 당면 목표를 위해, 코로나19를 가볍게 여겼던 결과다. 그러나 이 책에서 확인되는 놀라운 대목 중 하나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가능했던 배경이다. 저자는 일본 군국주의 시대 인간실험을 일삼았던 ‘731부대’에서 연원을 찾는다. 일본에서 초기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전문가 조직으로 꾸려졌던 이른바 ‘전문가회의’가 정확히 731부대의 디엔에이(DNA)를 넘겨받았음을 짚는다. 일본 저널리스트 고이케 아다라시는 지난해 4월 <분슌 온라인>에 발표한 글에서 전후에도 폭넓게 형성된 ‘전 731 부대원’ 네트워크가 전문가회의를 구성한 감염의학 관련 주요 연구소로 이어져 코로나19 대응 상황에서 ‘그림자 요소’로 작동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코로나19 대응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보여준 정보은폐와 관료주의는 제국 군대의 특성 그 자체였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이른바 ‘아베노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습. 코로나19 팬데믹에 늑장대응을 하다 뒤늦게 시작된 아베노마스크 정책은 국민의 외면과 비난을 받았다. UPI 연합뉴스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결과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전후 미국에 의존하여 폭발적 경제 성장을 일궈낸 일본이 1989~2019년 ‘헤이세이’ 시기에는 지속적 추락을 겪었다는 사실을, 주요 대기업들의 기업가치와 국내총생산(GDP), 국가채무 비율, 환율 등을 들어 설명한다. 일본의 각종 국제적 위상 변화는 일본이 더는 선진국이 아님을 보여준다는 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베 정권이 1965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감행한 ‘대한국 수출규제’는 사실상 자책골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해오던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와 수입다변화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반일 감정을 건드려 도리어 일본 경제가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까지 닥치며 세계 산업의 디지털 전환은 가속화됐는데, 디지털화에는 한국이 단연 앞서 있다. 한일역전의 상황은 향후 더욱 가속화할 것을 보여주는데, 2017년 구매력평가지수(PPP)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 한국은 일본을 처음으로 넘어섰다.

한일역전의 시대를 맞이하는 한국인의 자세는 어때야 할까?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연구활동에 매진하다 지난해 퇴직한 저자는 이를 통해 한일 역사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려면 “상당수 한국인을 포함하여 일본의 ‘극우 민족주의자와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일본은 언제나 옳고 우월하다는 믿음’을 깨트리는 것”이 중요하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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