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 승진? 아무 관심 없어".. 2030 '임포자' 빠르게 늘어난다[인사이드&인사이트]

서동일 산업1부 기자 입력 2021. 1. 15. 03:02 수정 2021. 1. 15.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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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승진 노력 대신 재테크 열풍
서동일 산업1부 기자
“일찍 임원 달고, 일찍 집에 가느니 부장으로 ‘장수’하는 편이 훨씬 낫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 5년 차 김모 대리(33)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해 말 평가에서 굳이 높은 점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스스로 점수를 매기는 평가에서 ‘A’ 대신 평균 점수인 ‘B’나 ‘C’ 등급을 부여했다. 김 대리는 “동기나 가까운 선후배들 중에서도 조직 내에서 자신의 성과가 돋보이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다”며 “회사 내에서 승진 경쟁에 힘 쏟을 시간에 차라리 주식, 부동산, 비트코인을 공부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샐러리맨의 꽃’이라 여겨졌던 임원 되기를 일찍부터 단념하는 ‘임포자’(임원 승진을 포기한 사람)가 빠르게 늘고 있다. 대기업마다 젊고 빠른 조직을 표방하면서 ‘30대 최연소 임원’ ‘40대 최고경영자(CEO)’ 사례가 등장했지만 1980년대생 이후 밀레니얼 세대 구성원 사이에서는 큰 동기부여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임원직이 보장해주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풍요가 싫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임원직은 누구나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선 삶의 질, 개인적 생활의 만족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하는데, 이를 싫어하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 승진보다 주식에 매달리는 임포자

임포자들은 대개 회사와 자신이 운명 공동체라고 여기지 않는다. 또 회사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회사 생활은 ‘적당히’ 하면서 업무보다는 재테크에, 월급보다 자산 가치를 늘릴 제2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회사에 쏟는 시간을 아껴 주식이나 부동산, 비트코인에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현명한 직장인’이라고 여긴다. 꼭 돈이 아니라도 개인적 취미나 여가를 위해서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대기업 10년 차 박모 씨(37)는 까마득히 높은 선배들에게 술자리마다 “회사 밖은 지옥이다”, “매달 정해진 날, 예측 가능한 돈이 통장에 들어오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 “직장생활의 꽃은 임원이 되고 나서야 핀다” 등의 조언을 자주 들었다. 좀처럼 회사 생활에 집중을 못 하는 후배들을 나무랄 때면 등장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박 씨는 후배들에게 다른 조언을 한다. “회사는 절대 너에게 부(富)나 행복을 선물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수십 년간 직장에 충성해 임원이 되는 것보다 일찍부터 주식, 부동산 등을 공부해 제2, 제3의 소득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는 편이 현명하다는 조언이다. 박 씨는 “최근 4, 5년 동안 회사 일에 매달린 사람보다 일찍 ‘영끌해’ 집이나 비트코인에 투자한 사람이 더 삶의 승리자로 보인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투자 성공 사례는 직장 생활을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한다”고 말했다. 이어 “동기 단톡방에서도 업무 이야기는 없고, 어떻게 하면 ‘8만전자’, ‘9만전자’(삼성전자의 주가가 8만 원, 9만 원대로 상승하는 것을 의미하는 신조어)를 따라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뿐”이라고 말했다.

직장 내에서는 ‘대리 갑질’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주 52시간제 시행과 직장인 괴롭힘 방지법 시행 이후로 차장, 부장, 임원들이 대리 눈치를 본다는 의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재택근무가 활성화되면서 사무실을 벗어난 임포자들에게 업무를 맡기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말도 나온다.

대기업 인사팀에서 근무하는 부장급 직원 A 씨는 “재택근무 중에는 사내 메신저 응답을 가족에게 부탁해놓고 개인 용무를 보러 다니거나 업무를 시켜도 ‘모르겠다’ ‘온라인으로는 의사소통이 어렵다’ 등을 이유로 일을 거절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숨을 쉬었다.

○ “회사 생활 열심히 해서 임원 달아도 1년이면 끝나는데….”

껑충 뛰어오르는 월급, 전용 사무실과 비서, 전용차, 비즈니스석 항공권, 골프장 회원권, 매월 수백만 원의 법인카드 활동비…. 수많은 대기업 임원 혜택에도 임포자가 느는 이유는 임원이 되기도 어렵지만 자리를 지키기는 것은 더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해 초 4대 그룹 계열사 중 한 곳은 ‘체질 개선’을 이유로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조직이 통폐합되면서 임원 4명 중 1명이 옷을 벗었다. 상무 1년 차였던 B 씨도 감축 대상자에 포함돼 물러나야만 했다. 쏟아지는 승진 축하 연락을 받은 지 만 1년을 채우지 못한 때였다. B 씨도 B 씨였지만, 조직 내에서 임원이란 목표를 향해 달려오던 부·차장급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줬다. 통폐합된 조직 내부에서는 ‘이직’을 고민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지금까지 기업 내에서 임원 승진을 한다는 것은 능력뿐 아니라 조직을 위해 쏟았던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상’의 의미도 적지 않았다. 상무 4년, 전무 2년이라는 ‘비공식 임기’를 채워주고, 퇴임 후에는 고문으로서 월급의 일부를 보상해주는 암묵적 관행이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사라지는 것이 요즘의 추세다. B 씨의 사례처럼 ‘민첩성 강화’ ‘의사소통 효율화’ ‘조직 단순화’ 등의 명분으로 짧게는 1년 만에 임원의 옷을 벗는 사례가 늘고 있다.

4대 그룹 한 전무급 임원은 “시대적으로 기업들이 젊고 빠른 조직을 꿈꾸면서 임원 승진의 문은 점차 좁아지고 있고, 반대로 옷을 벗는 임원들은 늘고 있다”라며 “상무 됐다고 박수 받은 지 1∼2년 만에 짐을 싸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솔직히 젊은 직원들 입장에서 임원보다 ‘만년 부장’으로 남겠다는 생각이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올해 차장으로 승진한 대기업 직원 이모 씨(38)도 “요즘 임원은 불과 1, 2년 만에 끝날 신기루 같은 꿈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며 “‘임오군란’(퇴임을 통보받은 임원은 군소리를 하거나 조직을 어지럽히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을 끝까지 지키면서 묵묵히 짐을 싸는 임원, 인사 시즌마다 집에 갈까 벌벌 떠는 임원들을 보면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만 든다”고 말했다.

자율적, 수평적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호칭을 통일하고, 직급 체계를 단순화하는 기업 트렌드가 자리를 잡으면서 ‘만년 부장’이 사라졌다는 것도 일부 임포자들을 늘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실제 기업마다 사원∼부장으로 나뉘었던 직급을 단순화하고, 역량 혹은 성과 중심의 임금 체계 개편 작업 등을 벌이는 중이다. 존칭이 빠진 영어 이름, 매니저 같은 단일 호칭 체계를 쓰는 기업이 늘고, ‘임원 아래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팀원보다 젊은 팀장, 과장 아래 차장이 등장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임포자들에게는 부담 없이 조직에 남아있을 수 있는 탈출구가 생긴 셈이다.

○ “이제와 임원 포기할 수는 없다”는 ‘낀 세대’

그럼에도 조직 내에서는 여전히 임원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10년 넘게 ‘승진’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차장, 부장급 직원들이다. 도무지 직장생활에 의욕을 보이지 않는 임포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랴, 상명하복에 익숙한 임원들에게 옛날식 후배 노릇을 하랴 ‘낀 세대’는 괴롭기만 하다.

코로나19로 언택트(비대면) 근무가 활성화됐다지만 “대리, 과장급들만 마음 편히 재택근무한다”고 푸념하는 차장, 부장급들이 적잖다. 실제 재택근무 중에도 사무실로 출근하는 사람은 임원과 바로 밑 부장급밖에 없다는 말도 나온다.

대기업 부장급 직원 C 씨는 “사무실에 나온 ‘막내’가 부장뿐이니 임원들의 말상대부터 스마트폰·컴퓨터 질문, 복사 등 잡무까지 도맡게 됐다”라며 “심지어 비서가 재택근무를 하면 그 일도 우리 일이 된다”고 말했다.

대기업 계열사 중 한 곳에서는 지난해 9월 팀장급 직원 중 한 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 회사는 당시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순환근무제를 시행 중이었지만 이 직원은 ‘재택근무일’임에도 사무실 출근을 했다가 문제가 됐다. 사무실로 출근해야 열심히 일한다는 평가를 받는 조직 문화가 아직 남아 있던 탓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솔직히 사원, 대리들과 달리 팀장급 직원들은 인사평가자 ‘임원’들 눈 밖에 날까 봐 재택근무도 마음 편히 못 한다”라며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이려다 되레 조직에 피해를 끼친 안타까운 경우”라고 말했다.

인사팀도 늘어나는 임포자에게 줄 ‘당근과 채찍’이 항상 고민거리다. 동기부여를 위해 젊은 인재를 주요 보직에 발탁하는 사례를 만들어도 임포자에게는 이렇다 할 ‘당근’이 되지 못하는 탓이다.

재계 관계자는 “‘임포자’라는 신조어 역시 밀레니얼 세대가 조직 내에서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생기는 변화 중 하나”라며 “기업마다 인사 평가 방식을 개선하거나 업무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등 일하는 방식의 혁신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서동일 산업1부 기자 d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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