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생활의 한 토막
[경향신문]
“승재와 계봉이는 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내려, 바로 빌딩의 식당으로 올라갔다. 계봉이도 시장은 했지만, 배가 고프다 못해 허리가 꼬부라졌다. 모처럼 둘이 마주 앉아서 먹는 저녁이다.”
1930년대 말에 쓰인 채만식(1902~1950)의 소설 <탁류> 속 어느 장면이 각별하지 않겠는가마는 음식이 있는 풍경 또한 못잖다. 식민지 현실이라든지 사실주의 같은 말은 잠시 접어두자. 최인호(1945~2013)에 앞서 성취한 빌딩 배경 연애는 덤이다. 고향을 떠난 젊은 남녀는 서울에서 드디어 서투나마 연인 관계로 접어든다. 함께 나눈 밥상의 추억은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곡절을 압도했다. 둘은 이제 저녁을 먹으며 로맨티시즘을 연마하는 중이다. “둘이 다 같이 군산 있을 적에 계봉이가 승재를 찾아와서 밥을 지어 준다는 게 생쌀밥을 해놓고, 그래도 그 밥이 맛이 있다고 다꾸앙쪽을 반찬삼아 달게 먹곤 하던” 추억―“그런 이야기를 해가면서 둘이는 저녁밥을, 한 끼의 저녁밥이기보다 생활의 즐거운 한 토막을 누리었다.”
‘생활의 한 토막’이라고 했다. 풋풋한 섹슈얼리티로 향한 전개 안에서 한 끼 식사에는 분명한 역할이 있다. 이전의 문학예술과는 다르다. <심청전>이 예가 되리라. 심청이 인당수로 떠나던 날 아침, 정성을 다한 마지막 밥상에는 자반과 김이 놓인다. 아비가 속도 모르고 딸자식에게 “얘, 오늘은 반찬이 매우 좋구나. 뉘 집 제사 지냈느냐?” 할 때 드러나는 바는, 있는 집 큰일에 쫓아가 허드렛일을 해 간신히 반찬거리를 마련하던 서민의 형편이다.
<춘향전>의 온갖 음식은 어떨까. 그네 타던 춘향이 마신 귤병이며 이몽룡이 월매로부터 대접받은, 소·돼지·꿩·닭·메추리 등 온갖 고기 요리와 전복에서부터 연근해와 기수역 생선이 망라된 요리 그리고 별별 과자와 과일과 술 등은 지역 부자가 쓸 수 있는 자원의 나열에서 멈춘다. 저 곤궁함 속에서나 이 호화로움 속에서나 음식과 이야기가 맺는 관계는 납작할 뿐이다. 아직 음식은 풍경이 되지는 못한다.
이윽고 최근 백 년 사이의 문학예술은 본격적으로 음식을 품기 시작했다. 군산 구멍가게로 온 원산발 부산 경유 북어, 열다섯 살짜리 기생이 일흔두 살 먹은 애인을 꼬셔 탐한 백화점 ‘난찌’, 부잣집에서 시킨 탕수육과 우동, 변변찮은 먹물들의 ‘청요릿집’ 회식, 공장 노동자가 30분 안에 해치워야 했던 꽁보리밥 ‘벤또’, 그래도 이어진 저잣거리의 설렁탕과 국밥, 역전의 대떡(가래떡) 등은 스스로 이야기가 되고 풍경이 되었다.
난찌가 런치로 우아하게 승격한 내력, 벤또가 도시락으로 착실히 순화된 연대기는 그것대로 또 하나의 이야기와 풍경을 지을 테다. 이는 아무래도 음미의 대상이겠다. 다시금 ‘생활의 한 토막’으로 돌아가본다. 독자 여러분께도 재삼 음미를 권한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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