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청와대 정치, 두려워하게 해달라
[경향신문]
“결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 것, 그것이 권력이다.”(한나 아렌트)
연초 청와대가 탈정치를 구상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청와대는 강하게 부인하지도, 구체적으로 반박하지도 않았다. 단지 “검토한 바 없다” “정책으로 승부하겠다”고만 했다. 언론의 넘겨짚기라 해도, 설혹 사실이라 해도 공개적으로 회자돼선 안 될 말이다. 청와대 탈정치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 포기 선언이다. 대통령은 시대가 요구하는 모든 가치의 총화이자 국정의 최종 책임자다. 그런데도 이 중요한 역할을 놓겠다는 것 아닌가. 다른 관점에서 보면 군림하겠다는 선포다. 권력의 정당한 위임이 정치라면, 정책은 가장 중요한 정치다. 그런데도 정책을 정치와 분리하는 발상은 입헌군주제 왕처럼 권위는 누리되 시민들 삶에는 관심 없다는 고백에 가깝다. 어떤 경우든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물론 여러 징후는 있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관련 사태부터 추·윤 갈등까지 1년 넘는 시간 동안 문 대통령은 나서지 않았다. 지난 11일 신년사엔 개혁, 통합과 같은 정치 메시지가 전무했다. 집권 여당 대표는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을, 국무총리는 의사 국시 재시험을 대신 총대 멨다. 청와대가 빠지려는 것 같다, 올 것이 왔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청와대 정부’라 불릴 정도로 청와대가 곧 권력이었던 정권이 왜 이 지경이 됐을까. 역설적이게도 ‘청와대 정부’라는 말에 원인이 있다. 문 대통령은 대선에서 ‘민주당 정부’를 공언했다. 민주정부라면 청와대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임의조직에 불과하다는 걸 강조한 말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는 막강한 힘을 행사했다. 장관 정책보좌관 임명까지 관여했고, 개헌 등 주요 현안을 해당 부처 장관이 아닌 수석이 발표했다. 국민청원 게시판은 행정부의 입지를 좁혔다. 청와대가 대통령의 통치권을 대리하는 기관이냐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한나 아렌트의 경고를 재해석하면 모든 에너지가 청와대라는 총구에 몰린 것이다. 총구는 좁다. 좁은 총구로는 ‘등장 공간’(뜻 모아 함께 행동하는 공간)을 만들 수 없다. 좁아질수록 ‘하나가 모두와 대립하는’ 정치가 불가피하다. 청와대·여당 할 것 없이 지지층 눈치 보는 데만 급급하지 않았나. 편하고 따뜻하겠지만 당파적 행보가 쌓이면 대통령의 공간이 좁아지게 된다. 외롭고 춥고 쓸쓸해진다.
현안에 제대로 된 해법을 제시하기 어려우니 정치적 깃발을 들지 않겠단 것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문재인 정부의 가치와 철학을 짚어봐야 한다는 말이다.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지난 총선 당시 위성정당 창당은 정치개혁 무의지를 드러낸 시그널이다. 다수연합제가 아닌 양당제를 택한 후과는 번번이 180석 독주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사람이 먼저라고 했지만 누더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선 인간 존중을 읽을 수 없다. 경제성장을 위해 노동자 목숨쯤이야란 인식이 아니고선 만들 수 없는 법안이다. 나중에서야 ‘국민 눈높이’를 강조했지만 사면 제안은 국면전환용 낡은 공학에 가깝다. 촛불을 든 시민들이 자기부정을 하지 않는 이상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에 동의할 수 있겠나. 이 모든 과정을 여당이 주도했다고 발 빼지 말자. 당·정·청이 일심동체였단 게 알려진 이상, 청와대의 책임을 묻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만약 대통령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면 참모들의 책임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 내부에서 “이건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라고 끈질기게, 적극적으로 나선 참모가 있었다면 문재인 정부가 역점을 둔 정책이 이렇게 왜곡되진 않았을 테다. 얼마 전 “문 대통령의 비극은 문재인 시대를 위해 뛰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라고 했던 지인의 말이 생각난다. 문 대통령 주변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한을 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정권도 인간의 입김이 서려 있는 한, 그럴 수 있다. 적폐 청산도 그 연장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새 시대의 주류다. 주류라는 자각이 무뎌지면 권력 행사를 절제하지 못하고, 때론 정당한 개혁도 정치 보복으로 오인받기 쉽다. 문 대통령 5년 임기 중 남은 1년은 긴 시간이다. 탈정치도 기막힐 일인데 보수언론은 국밥 사진과 가문 뿌리까지 동원하며 차기 대통령 만들기를 노골화하고 있다. 현재 권력을 대놓고 무시하는 처사다. 마키아벨리의 경고가 적확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도자는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낫다’. 앞으로 1년, 청와대 정치를 몸서리치도록 두려워하게 해달라.
구혜영 선임기자 koo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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