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멈춰선 농촌의 작은 목욕탕
[경향신문]
몰아친 한파에 아파트니까 괜찮지 않을까 방심을 한 것이 패착이었다.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방학이고, 사람 만나지 말라가 국시가 된 마당에 며칠 씻지 않는다고 큰 불편이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양치를 해도 이가 시리고 고무장갑을 끼었는데도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았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겨울에 온수 쓰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다가 이번 한파에 된통 당했다.
연탄보일러를 때던 시절에는 겨울에 씻는 일은 늘 고역이었다. 엄마가 아침마다 뜨거운 물 한 바가지를 세숫대야에 부어주면 고양이 세수를 했고 머리는 일주일에 한 번 감을까 말까였다. 그러다 연탄불을 갈지 않아도 되는 기름보일러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기름값이 무서워 겨울에는 온 식구가 한 방에 몰아서 지냈다. 온수는 아침에 잠깐 틀어 식구들 한꺼번에 씻고 나면 엄마는 매정하게 바로 보일러를 끄곤 했다. 이제 내겐 ‘그때를 아십니까?’ 정도의 추억담이지만 여전히 연탄과 기름보일러의 시절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19로 방역단계가 올라가도 대중목욕탕 영업을 중지할 수 없는 이유가 여전히 온수가 나오지 않는 주거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야외에서 일을 하거나 취약계층 가운데 목욕탕 말고는 씻을 곳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설명을 듣고, 이 와중에 ‘사우나’에 왜 들락거리냐 힐난했던 입도 쏙 들어가고 말았다.
식당 영업에 대한 논란도 많지만 식당에서 모든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 외식산업연구원의 조사에서 보면 방문 외식의 유형은 끼니를 위한 한식이 1위를 차지한다. 제일 많이 먹는 메뉴는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다. 주방시설을 갖추고 있지 못하거나 조리도구와 식재료를 제대로 갖출 수 없어 식사를 마련할 여건이 안 되는 이들도 많다. 길 위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포장 배달을 해서 먹을 장소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식당 밥은 생존이다. 사는 만큼만 생각하고 살았던 탓에 목욕탕도 식당도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시설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농촌은 여전히 기름보일러 시대다. 기름을 때서 목욕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겨울이면 몇 드럼씩 들어가는 기름값도 무섭지만 노후 주택은 단열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고령의 농촌 주민들은 겨울에 씻는 것 자체가 큰일이다. 읍·면 단위에 있었던 대중목욕탕은 사라졌고, 시·군 단위까지는 나가야 목욕탕이 있다. 그래서 요 몇 년 농촌의 ‘작은 목욕탕’ 사업이 인기였다. 국비와 지자체가 재정을 부담해 작은 규모의 공중목욕탕을 짓고 주민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하는 복지사업이다. 워낙 호응이 좋아 작은 목욕탕 사업은 농어촌 지자체장들이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참고로 작은 목욕탕은 남탕과 여탕이 따로 없다. 요일별로 어느 날은 남자만, 어느 날은 여자만 이용하고 젊은이들은 동네 어르신을 만나면 등을 밀어드리느라 조금 힘들다는 푸념도 있긴 하다.
농촌경제연구원의 보고서에서 보면 농촌 주민들이 꼽은 만족도가 높은 공용시설은 마을목욕탕과 마을회관이다. 농촌의 마을회관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한 데다 공동식사를 하고 여가를 보낼 수 있기 때문에 농촌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 시설이다. 어떤 마을은 겨울에 노인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공동생활을 하기도 한다. 긴 겨울 노인들이 전기장판에 의지해 춥게 지내다 병을 얻고, 큰 눈이 내려 고립되면 안전사고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이토록 귀한 작은 목욕탕과 마을회관이 코로나19로 멈춘 지 1년이 되어간다. 따뜻한 식사와 난방, 그리고 목욕. 이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이를 인권 혹은 기본권이라 부른다. 이 기본이 멈췄다면 이보다 더 시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방역으로 정신이 없어도 꼭 살펴봐야 할 일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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