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자본주의' 시대의 공산주의

장정일 2021. 1. 15.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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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패닉: 코로나19는 세계를 어떻게 뒤흔들었는가〉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북하우스 펴냄
ⓒ이지영 그림

매해 연말 언론은 ‘세계 10대 뉴스’와 ‘국내 10대 뉴스’를 선정한다. 하지만 팬데믹이 휩쓴 2020년은 이런 관례적인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팬데믹의 위력은 지난 한 해 국내와 세계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을 다 집어삼키고도 남는다. 누구의 입에서 처음 나온 재담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인류 문명은 코로나 이전(BC:Before Corona)과 코로나 이후(AC:After Corona)로 나뉠 것이라는 말이 더 이상 재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지난해 2월부터 국내에 쏟아진 코로나 관련 서적은 무려 500여 종이다. 그 가운데 몇 권을 이 지면에 소개한 바 있으나(〈시사IN〉 제619호 참조), 여기 두 권을 더 추가한다. 첫 권은 파올로 조르다노의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은행나무, 2020)이다. 지은이는 2020년 초 이탈리아가 중국·싱가포르·일본·홍콩·한국·이란과 함께 감염의 주요 7개국(G7)으로 분류된 위험 국가 중에서도 사망률 선두를 달리고 있을 때, 봉쇄된 로마에서 이 책을 썼다. 지난해 4월 초에 한국어 번역본이 나온 이 책은 아마도, 코로나19(공식 명칭 COVID-19)에 관해 대중이 읽을 수 있었던 세계 최초의 단행본일 것이다.

코로나19처럼 과학이나 과학 현상을 다룬 책은 조금이라도 출간 일자가 늦은 신간이 그보다 앞서 나온 구간보다 알차다. 뉴턴의 〈프린키피아〉(1686)를 예로 들어보면, 이 책은 과학사가에게나 의미가 있을 뿐, 물리학을 공부하려는 현대의 물리학도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과학적 규명과 지도가 목마른 코로나 사태 역시 최신 정보를 담고 있는 신간이 현실 판단을 더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토리노 대학에서 취득했던 물리학 박사 경력을 버리고 일찌감치 소설가로 전업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조르다노의 이 책은 코로나 사태로 한 해를 온전히 보내고 난 이 시점에도 여전히 낡지 않은 분석과 성찰을 과시한다.

바이러스에게 인류는 오직 세 종류로 나뉜다. 감염 가능자, 감염자, 회복자. 전염은 연쇄반응처럼 시작되어 기하급수적이 되는데, 감염자가 많을수록 전파력은 더 빨라진다. 얼마나 빠른지는 모든 전염병이 숨기고 있는 숫자에 달렸는데, 그 수치는 ‘R0’라는 기호로 표시되고 ‘알제로’라고 읽는다. 모든 질병은 그만의 R0 값이 있지만, 전염병의 R0 값을 찾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초기에 코로나19의 R0 값을 2.2~2.7 정도로 추측했으나, 조사기관과 지역에 따라 이 수치는 5.7로 치솟기도 한다. 하지만 지은이는 지난 세기에 유행한 스페인 독감의 R0 값은 2.1가량이었지만 전 세계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면서, R0 값이 높고 낮은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지금 꼭 필요한 생각으로의 초대”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R0 값이 1 미만으로 줄어들어 모든 감염자가 한 사람을 채 감염시키지 않아야 상황이 나아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확산이 저절로 멈추고, 질병은 종식된다. 그와 반대로 만약 R0 값이 1을 조금이라도 넘는다면 유행병은 계속된다. 좋은 소식은 R0 값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순전히 우리 손에 달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감염 가능성을 낮춘다면, 바이러스가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옮겨가지 못하게 행동한다면, R0 값은 내려가고 전염 속도는 줄 것이다.”

세계는 종전의 어느 바이러스와도 다른 신종 바이러스에 항체도 백신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허를 찔렸다. 지은이는 “현재 우리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백신은 신중함뿐이다”라면서 “우리가 필요한 기간만이라도 단호하게 사회적 거리를 둔다면 마침내 R0 값은 임계점 아래로 내려가 전염병의 기세는 수그러들 것이다”라고 말한다. 조르다노는 코로나 사태를 맞아 사회적 거리두기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유럽의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보기 드물게 입바른 목소리를 냈다. 그는 제일 나은 선택은 나의 이익과 다른 모두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라면서 코로나 시대에 개인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결정을 이렇게 요약했다. “미안하지만 일정을 다시 잡아야겠어요.”

조르다노는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새로운 전염병을 가리켜 “어쩌면 지금 꼭 필요한 생각으로의 초대”라면서, 전염의 시대에 ‘우리 사회’는 ‘인류 사회 전체’를 뜻한다고 말한다. 슬라보이 지제크(슬라보예 지젝)는 이런 주장에 열렬히 공감한다. 지제크는 코로나 사태 직후, 공산주의만이 우리가 겪고 있는 지구적 위기를 극복하게 해주고, 팬데믹 이후에 전개될 야만의 시대를 물리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이 발언으로 지제크는 여러 군데에서 비웃음을 당했다. 하지만 〈팬데믹 패닉:코로나19는 세계를 어떻게 뒤흔들었는가〉(북하우스, 2020)를 보면 지제크의 진의가 구소련이나 동독과 같은 30여 년 전의 공산국가로 회귀하자는 주장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제크가 늘 말해왔듯이, 그에게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건설하자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 혹은 공동의 문제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와 연관되어 있다.

팬데믹을 맞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정부가 민간부문에 지시해 비상시 의료장비들의 생산을 독려할 수 있는 국방물자조달법과 정부의 민간부문 통제를 허용하는 연방 조항을 발동하겠다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 모든 성인 시민권자에게 1000달러 수표를 지급하는 전 국민 기본소득을 논의했다. 트럼프가 모든 관행적 시장 법칙을 위반하는 데 수조 원을 쓸 구상을 하고 있던 2020년 3월,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는 영국 철도의 한시적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 사례들은 팬데믹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표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이 어떻게 공산주의 처방에 의지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허다한 사례 가운데 지극히 적은 일부다.

“여기가 바로 나의 ‘공산주의’ 개념이 등장하는 지점이다. 막연한 꿈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 혹은 적어도 많은 사람이 필수적이라고 느끼는 것, 이미 고려되고 있고 더러는 일부 시행되기도 한 조치들을 지칭하는 명칭으로서의 공산주의. 이것은 장밋빛 미래를 밝혀줄 비전이 아니라 재난 자본주의의 해독제로 쓰일 ‘재난 공산주의’ 전망에 더 가깝다. 국가가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떠맡아 마스크, 진단키트, 산소호흡기같이 긴급하게 필요한 물품들의 생산을 조정하고, 호텔들과 다른 휴양지들을 고립시키며, 이번에 실직한 모든 사람의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등의 조치를 수행해야 함은 물론, 이 모든 일을 시장 메커니즘을 버려가며 해야 한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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