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본다, 고전] "스토너 형, 인생이 왜이래"

2021. 1. 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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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존 윌리엄스 '스토너'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작가들이 첫손에 꼽는 산문가, 박연준 시인이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 글을 씁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일상이 지겨운 사람, 새해 들어 뭐 좀 특별한 일이 없을까 한숨을 쉬는 사람, 스스로의 평범함에 시무룩해진 사람, 모름지기 ‘소설’에는 대단한 사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다.

소설은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의 일대기다. 1891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미주리 주의 대학에 입학하고, 학자와 교수로서 연구에 매진하고, 결혼 해 아이를 낳고, 1956년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시간 순으로 펼쳐진다. 대단히 특별한 사건? 그런 건 없다. 범상한 날들 속 크고 작은 문제를 맞이하며 나아가는 인물을 보여줄 뿐이다. 한 길만을 걸어온 자의 생이 그렇듯이 매일은 무료해 보이지만, 돌아보면 한 방향으로 난 시간의 궤적이 제법 굵직하게 새겨져있음을 보여주는 삶. 작가는 말한다.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스토너를 슬프고 불행하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스토너의 인생에 모험이나 혁명은 없었다. 전쟁에 나가는 대신 대학에 남아 학자의 길을 걸었고, 세상을 뒤집을만한 책을 쓰는 대신 평범한 논문형식의 책을 성실히 집필했다. 행복을 기대했지만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한 달 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105쪽)

게티이미지뱅크

문제가 있을 때 자기 의견을 피력하거나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일만이 ‘최선’은 아니라고, 다른 식으로 사는 자도 있는 법이라고 스토너는 말하는 것 같다. 고통을 수렴하는 몸처럼, 스토너는 견디고 기다렸다. 훗날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만 위험을 감수하며 그 사랑을 유지하는 대신, 사랑을 놓고 한순간에 노인처럼 늙어버린다. 그는 가질 수 있는 것을 무리해서 갖지 않았다. 피할 수 있는 고난을 애써 피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 길을 갔다. 그렇다고 스토너의 인생이 무력하거나 하찮았다고 할 순 없다. 그는 삶이 주는 고통, 기다림, 인내, 사랑, 역경, 일, 열정, 후회, 두려움, 희망, 기쁨, 슬픔 등을 성실히 겪은 뒤 죽음을 맞이했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거라면 무엇이든 기탄 없이 받아들였다.

햄릿이나 돈키호테처럼, ‘스토너 형’ 인물을 만든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스토너 형’이란 이런 타입을 뜻할 것이다. 참을성이 많으며 진중한 사람. 상황을 탓하지 않고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게으름과 무지를 싫어하며, 고지식할 정도로 묵묵히 학문에 정진하는 사람. 정직한 학자 타입. 평범함의 지극함을 실천해 거의 ‘성자’처럼 보이는 생을 사는 사람. 자기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력자를 향해 “자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이나 내게 ‘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써 본 적” 없노라고 말하고는 돌아서 나가는 사람. 이는 또 다른 종류의 갈릴레이가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갈 길 가련다! (언뜻 떠오르는 ‘스토너 형’ 인물로는 아모스 오즈의 소설 '나의 미카엘'에서 ‘미카엘’ 정도가 있겠다.)

애초에 인간에게 ‘평범’이나 ‘특별’ 따위가 있을 리 없다. 평범도 특별도, 바라보는 외부자의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 스토너는 스토너였다. 자기 자신으로 살다 간 사람이었다.

스토너·존 윌리엄스 지음·김승욱 옮김·RHK 발행·396쪽·1만5,000원

책을 다 읽은 뒤에도 스토너 곁을 떠나기 힘들지도 모른다. ‘스토너, 스토너’ 혼자 중얼거리며 그의 삶에 다시 들어가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내가 그랬다). 그의 시작과 끝을, 영속과도 같은 일상을 독자가 함께 겪었기 때문이다. 어릴 땐 요절이 근사해 보였으나 이젠 안다. 누구라도 인생을 끝까지, 제대로 살아내는 일이 귀하다는 것. 자기 일을 오랜 시간 해왔을 뿐인데, 어느새 폭삭 늙어버린 모습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삶, 이런 삶이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비범’을 간직한 채 평범하게(혹은 평범해 보이게) 사는 일이 아닐까. 끊임없는 자기 수양과 다독임, 생을 향한 긍정 없이는 어려운 일일 테니까.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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