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퀴더라도, 붙들어라' 페미니스트 선배가 건네는 위로

강윤주 2021. 1. 1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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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스 체슬러는 1970년대 2세대 페미니즘을 개척한 인물이다.

1세대 페미니즘이 여성 참정권 등 제도적 성 평등에 집중했다면, 2세대 페미니즘은 여성을 둘러싼 문제를 전방위로 공론화 했다.

힘겹고 험난했지만 그래서 더 찬란하게 빛났던 2세대 페미니즘이 걸어왔던 여정이 체슬러의 회고로 펼쳐진다.

체슬러가 2세대 페미니스트들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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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1988년 여성 재생산권 수호 운동을 펼치고 있다. 왼쪽에서 네번째가 필리스 체슬러다. 재생산 권리란 차별, 강요, 폭력, 사회적 낙인 없이 자녀를 가질지 여부와 시기, 방법, 자녀의 수 등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사할 권리를 말한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가 지난해 10월 '공개한 성·재생산권리 보장 기본법(안)에 따른 설명이다. 바다 출판사 제공

필리스 체슬러는 1970년대 2세대 페미니즘을 개척한 인물이다. 1세대 페미니즘이 여성 참정권 등 제도적 성 평등에 집중했다면, 2세대 페미니즘은 여성을 둘러싼 문제를 전방위로 공론화 했다. 성폭력, 낙태, 가부장제, 부부 강간, 경제적 차별과 평등권 등 “페미니스트로 사는 내내 이곳 저곳에 있었다”고 할 만큼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핏대 높여가며 사력을 다해 싸웠다.

힘겹고 험난했지만 그래서 더 찬란하게 빛났던 2세대 페미니즘이 걸어왔던 여정이 체슬러의 회고로 펼쳐진다. 책에는 승리의 기록만 있는 건 아니다.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서로에게 관대하다가도, 서로를 질투하고 경계했으며, 연대하면서도 경쟁하기를 반복했다.

필리스 체슬러의 또 다른 저서 'Woman's Inhumanity to Woman'(2009)은 국내에 '여자의 적은 여자다'란 제목으로 번역됐다. 그래서 이 말을 체슬러가 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책에서 그는 이 말에 진저리가 난다고 했다. "늘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서로를 구원한다. 대다수의 여자들은 서로의 친밀한 관계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낼 수가 없었다"면서 말이다. 바다 출판사 제공

체슬러는 그 살벌한 '내전'의 원인을 이렇게 분석한다.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들 대부분은 지독하고 노골적인 싸움에 심리적으로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여자들은 모든 갈등을 정치적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겪어냈다.” 사회가 주입한 혐오와 차별, 갈등을 내면화한 페미니스트들은 정치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미숙하고 불완전했다.

체슬러도 배신으로 상처를 입었다. 흑인이었던 직장 상사로부터 강간을 당했을 때, 그의 동료들은 “백인 페미니스트 단체가 흑인 남성을 폭로하면 자칫 미국 페미니즘이 인종차별을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폭로를 막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스트·필리스 체슬러 지음·박경선 옮김·바다출판사 발행·460쪽·1만8,500원

그렇다고 2세대 페미니즘이 멈춰서거나 무너졌던 건 아니다.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분열이 주변을 휩쓸고 갔을 때도 우리는 서로를 꼭 붙들었다.” 한계나 실수를 인정했고, 서로의 다름을 기꺼이 견디며, 끝까지 버텼다. 체슬러가 2세대 페미니스트들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는 감사의 말에서 함께 투쟁했던 수많은 자매들을 일일이 호명한다. 선두에 가려져 조명 받지 못했거나, 익명으로 참여한 수많은 여성들까지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마음에서다. 50년 전 체슬러와 동료들이 싸웠던 문제들은 2021년에도 여전히 남아 있고, 서로 할퀴고 생채기를 내는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내전도 현재진행형인 듯 하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건, “끝까지 붙들라”는 체슬러의 진심어린 위로와 응원 덕분 아닐까.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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