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의 특급논설] 트럼프 탄핵, 삐딱하게 보기
꼭 이렇게 수모를 줘야 하나
민주당의 복수극 느낌 들어
여전히 미국인 절반가량이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
비록 트럼프는 떠나가도
트럼피즘은 남을 것 관측
바이든 통합 진심이라면
트럼피즘부터 포용해야
[파이낸셜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면초가에 빠졌다. 지지자들이 워싱턴 의사당을 난입(1월6일)한 배후인물로 찍힌 탓이다. 조 바이든 당선인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하원은 13일(현지시간) 내란 선동을 이유로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찬성 232표, 반대 197표. 공화당 의원 10명이 동조했다. 이제 공은 상원으로 넘어갔다.
한가지 의문이 든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민주당은 왜 기를 쓰고 트럼프를 쫓아내려 하나. 어차피 트럼프는 이달 19일이면 임기 만료다. 사실상 죽은 권력이다. 바이든 당선인이 20일 정식 취임한다. 트럼프 통치를 4년 견뎠다. 며칠만 지나면 자동해결인데 그걸 참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탄핵하면 다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닌 모양이다. 얼마전 CNN은 팩트체크 기사에서 "탄핵 자체만으론 트럼프의 2024년 대선 출마를 막을 수 없다"고 보도했다. 그럼 그저 트럼프가 미워서? 그렇다면 문제다. 탄핵은 갈가리 쪼개진 미국의 또다른 단면이다.
역사를 보면 탄핵은 감정에 치우쳐 처리할 일이 아니다. 샴페인을 터뜨릴 일은 더더욱 아니다. 미국과 한국의 탄핵 정치학을 살펴보자.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나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16대)이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두번째 임기를 시작하고 겨우 40일이 지났을 때 워싱턴DC에 있는 포드극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링컨이 죽고 부통령 앤드류 존슨(1808~1875)이 17대 대통령에 올랐다. 존슨은 남부 테네시 출신으로 내전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데 힘을 쏟았다. 노예해방보다는 남북을 다시 하나로 묶는 게 급하다고 봤다.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은 생각이 달랐다. 그 바람에 사사건건 대통령과 의회가 으르렁댔다.
1866년 의회는 민권법을 통과시켰다.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든 미국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내용을 담았다. 존슨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자 의회는 3분의 2 찬성으로 민권법을 확정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의회가 대통령 거부권을 무력화한 사례다.
에드윈 스탠턴 해임을 둘러싼 공방은 오기 대 오기의 충돌이었다. 스탠턴은 전쟁장관으로 북군의 승리를 이끈 주역이다. 그는 공화당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유화적인 자세를 마뜩찮게 여겼다. 1867년 의회는 스탠턴의 해임을 막을 목적으로 공직자임기법(Tenure of Office Act)을 만들었다. 상원의 인준을 거쳐 임명한 공직자를 대통령이 제멋대로 경질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그러자 존슨 대통령은 법의 빈틈을 노렸다. 곧 의회가 휴회 중일 때는 대통령이 장관을 직무정지시킬 수 있었다. 이어 남북전쟁의 영웅인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을 스탠턴의 자리에 앉혔다. 의회에선 난리가 났다. 강직한 그랜트 장군은 자진 사퇴했다. 장관 자리는 다시 스탠턴에게 돌아갔다.
이게 끝이 아니다. 존슨 대통령은 재차 스탠턴을 해임하고 로젠조 토마스 장군을 임명하는 강수를 뒀다. 스탠턴은 사퇴를 거부했다. 한 지붕 두 장관이라는 기묘한 상황이 빚어졌다. 잔뜩 열 받은 의회는 11가지 죄목을 들어 대통령 탄핵안을 냈다. 하원을 무난히 통과한 탄핵안은 상원으로 갔다. 상원은 탄핵 재판부, 우리로 치면 헌법재판소 역할을 한다. 재판장은 대법원장이 맡는다. 의결 정족수는 3분의 2 찬성이다. 탄핵심판 1차 표결은 찬성 35표, 반대 19표로 딱 1표가 모자랐다. 열흘 뒤 탄핵 사유를 추가해 2차 표결에 부쳤다. 결과는 35 대 19로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존슨 대통령은 임기를 꽉 채우고 물러났다.
존슨 대통령 시절은 백악관과 의회의 강대강 충돌이 일상화했다는 점에서 21세기 트럼프 시대의 예고편을 보는 듯하다.
존슨은 탄핵 1호라는 불명예를 안았지만 상원 덕에 쫓겨나진 않았다. 37대 리처드 닉슨 대통령(재임 1969~1974)은 탄핵 열차가 출발하자 차라리 사임하는 쪽을 택했다.
1972년 11월 재선에 도전한 닉슨은 통쾌한 승리를 거뒀다.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는 맥을 못췄다. 선거인단 확보수는 520명 대 49명, 일반 득표율은 61% 대 38%로 역대급 격차를 보였다. 닉슨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대선 전 워싱턴DC 워터게이트호텔에 있던 민주당 선거본부에 괴한이 침입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닉슨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워싱턴포스트지의 민완기자 둘이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사건은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비화했다. 버티는 데 한계를 느낀 닉슨은 특별검사 임명에 동의했다. 사건은 닉슨의 거짓말 논란으로 번졌다.
1974년 7월 하원 법사위는 닉슨 탄핵을 권고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죄목은 셋. 사법방해, 직권남용, 의회 모독이었다. 법안은 즉시 하원 본회의로 넘겨졌다. 코너에 몰린 닉슨은 8월8일 TV 생중계를 통해 사임을 발표했다. 탄핵열차는 거기서 멈췄다. 닉슨은 탄핵 불명예를 피한 대가로 사임 1호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빌 클린턴은 젊고 유능한 민주당 대통령(재임 1992~2000)으로 1996년 재선에 성공했다. 2년 뒤 이른바 르윈스키 스캔들이 미국은 물론 지구촌을 달궜다. 세계 최강 미국의 대통령이 백악관 인턴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식에 세계는 경악했다. '부적절한 관계'는 세계의 유행어가 됐다.
속이야 어떻든 미국은 겉으론 청교도 정신에 충실한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1998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 장악력을 높였다. 보수색이 짙은 뉴트 깅그리치가 의장이었다. 탄핵 강경파인 깅그리치의 주도 아래 하원은 12월에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상원은 대통령 탄핵에 소극적이다. 1999년 2월 상원은 탄핵심판에서 위증, 사법방해 혐의를 모두 부결시켰다. 위증은 찬성 45표 대 반대 55표, 사법방해는 50표 대 50표로 둘 다 3분의 2 요건(67표)을 채우지 못했다.
클린턴은 존슨에 이어 하원에서 탄핵안이 처리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하지만 존슨과 마찬가지로 상원에서 기사회생했다.
하원은 13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죄목은 내란 선동, 무시무시하다. 지지자들이 의사당을 난입한 책임을 물었다. 이로써 트럼프는 하원에서 두 번 탄핵 당하는 첫번째 대통령이란 오명을 뒤집어썼다.
앞서 2019년 12월에도 하원은 탄핵안을 처리했다.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발단이었다. 트럼프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바이든 부자에 대한 수사를 종용하고, 이를 군사 원조와 연계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하원은 권력 남용과 의회 방해 혐의를 적용했다. 이때 트럼프는 존슨·클린턴에 이어 하원에서 탄핵 당한 세번째 대통령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트럼프에겐 상원이란 버팀목이 있었다. 2020년 2월 상원은 탄핵안을 기각했다. 상원은 공화당이 다수당이었다. 100석 중 53석을 차지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미트 롬니만 빼고 다 트럼프 편에 섰다. 찬성 요건(67표)에 턱없이 모자랐다. 트럼프는 유유히 권좌에 복귀했다.
이번에 어떨까. 곧 개회할 상원 의석은 50대 50으로 바뀌었다. 카밀라 해리스 부통령이 상원 의장을 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민주당에 유리한 구도다. 하지만 여전히 탄핵 요건, 곧 찬성표 67표엔 한참 모자란다. 공화당 상원의원 가운데 17명이 끈떨어진 트럼프를 버리는 사태가 올까. 글쎄, 그럴 것 같진 않다.
해방 이후 한국에선 두 번 대통령을 탄핵했다. 2004년 3월 국회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엄청난 후폭풍을 불렀다. 한달여 뒤 4월 총선에서 노 대통령이 이끌던 열린우리당이 압승했다.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은 참패했다. 이어 5월에 헌재는 탄핵심판을 기각했고, 노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했다. 적어도 한나라당에 대통령 탄핵은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 됐다.
2016년 12월 국회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했다. 이어 이듬해 3월 헌재는 대통령을 파면했다. 노무현 기각과 정반대다. 박근혜는 탄핵으로 쫓겨난 첫 대통령이 됐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했다. 2020년 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과반을 훌쩍 넘어 거대여당으로 올라섰다. 아직은 탄핵이 더불어민주당에 유리하게 작동하는 듯하다. 하지만 최종 판단은 2022년 봄 대선을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서양엔 휴브리스(Hubris)를 경계하는 전통이 있다. 우리말로 풀면 오만방자 정도일 듯 싶다. 시신을 훼손하는 것도 휴브리스다. 브래드 피트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 역으로 나온 '트로이'(2004년)란 영화가 있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왕의 아들 헥토르를 무찌른 뒤 시신을 질질 끌고 간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프리아모스왕은 절망한다. 그날 밤 왕은 몰래 그리스 진영을 찾아 아킬레우스에게 아들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부탁한다. 아킬레우스는 청을 흔쾌히 들어준다.
미국 정치에서 휴브리스가 기승을 부린다. 끈떨어졌다고 봐주지 않는다. 2018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 지배권을 되찾았다. 이때부터 트럼프 대통령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공화당과 민주당의 격돌이 불을 뿜었다. 작년 2월 트럼프는 국정연설을 위해 의회를 찾았다. 펠로시가 관례상 내민 손을 트럼프가 뿌리쳤다. 성깔 있는 펠로시 의장은 보란듯이 트럼프 연설문을 찢어버렸다.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미국 정치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 누구 탓이냐를 놓고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는 미국 정치, 싸우다가 타협하고 국익 앞에서 하나로 뭉치는 전통은 '아, 옛날이여'가 됐다는 점이다.
지난 11월 대선에서 내가 제일 놀란 것은 바이든 당선이 아니라 여전히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인이 절반 가까이 된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4년 전보다 1000만표 넘게 많은 7422만표를 얻었다. 득표율은 46.8%로 바이든(51.3%)에 완패라고 보긴 어렵다. 트럼프는 떠나도 트럼피즘은 살아있을 것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바이든은 줄곧 통합을 강조한다. 취임식 연설도 하나가 된 미국(America United)을 주제로 잡았다. 트럼프 탄핵은 통합 기조와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돋보인다. 그는 수정헌법 25조를 발동해 트럼프의 직무를 박탈하라는 의회 압력을 거부했다. 펜스는 12일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트럼프의 임기가 8일 남았음을 상기하면서 "국가의 명운이 심각한 상황에서 정치적 게임을 벌이려는 하원의 노력에 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펜스 부통령은 6일 의회 난입 사태에도 불구하고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바이든의 당선을 확정짓는 절차를 마무리지었다. 그 바람에 트럼프 지지자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당하는 형편이다.
너덜너덜해진 트럼프가 두들겨 맞고 있다. 4년 내내 독선 정치를 편 결과다. 어쩌다 미국이 이렇게 됐을까. 미국도 한국도 통합이 문제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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