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징 코리아, 지식사회에서 지혜사회로>"AI·빅데이터 넘어 '생명'으로까지 나아가야 '지혜' 나온다"
④ 이어령 선생에게 듣는다 <끝>
‘지혜 → 지식 → 정보 → 데이터’순서로 발전해온 문명사
AI시대엔 逆으로 흘러…‘인공지혜’까지 이어져야
산업화 관점서 인공지능은 인류에 위협이지만
‘디지로그’활용해야 인류와 ‘either or’아닌 ‘both and’
‘시대의 지성’ 이어령(87) 선생은 “내가 몸이 많이 아파요”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우리 나이로 미수(米壽)에 접어든 그는 현재 암 투병 중이다. 체중이 50㎏대로 내려왔다고 한다. 항암치료를 거부한 채 집필에 몰두하고 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긴 원고를 쓰기 힘든 상황이다. 선생은 “이제 내가 말을 많이 하면 목소리가 갈라집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지혜가 왜 중요한지, 지혜가 이 시대에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노학자의 목소리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의 말은 거침없이 개념의 본질로 향했다. 이 선생은 지혜·생명의 도식에서 시작해 생명 경제,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이 아닌 인공지혜(AW·Artificial Wisdom)의 중요성 등을 술술 풀어냈다. 선생은 ‘지식 사회’에서 ‘지혜 사회’로의 전환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사실 지혜와 관련된 이야기는 10년 전부터 내가 했어요. 아주 중요한 주제예요”라며 웃어 보였다.
이 선생은 “내가 (아파도) 또박또박 말할 수 있다”고 했고, 실제 ‘또박또박’ 어려운 개념을 설명했다. 통화하는 내내 그는 즐거움을 감추지 않았다. ‘지식의 전이’에 대한 뿌듯함, 일생의 연구 주제에 대한 자신감 등이 느껴졌다. 이 선생과의 신년 기획 인터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험과 선생의 병세 등을 고려해 지난 5일 전화로 진행됐다.
선생은 “‘지혜’의 개념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며 ‘WKID’ 도식을 설명했다. “수렵채집 시대에서 농경 시대로 가면서 인간은 지혜(W·Wisdom)를 넘어 지식(K·Knowledge)을 필요로 하게 됐죠. 이후 산업화, 정보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네트워크화된 지식, 즉 정보(I·Information)가 문명을 이끄는 힘이 됐고, 지금 시대에는 데이터(D·Data)가 중요한 데이터 자본주의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혜→지식→정보→데이터(W→K→I→D)’의 순서로 발전해 온 문명사의 흐름은 오늘날 AI의 출현으로 반대로 흘러갑니다. ‘데이터→정보→지식→지혜’의 역순(DIKW 피라미드)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죠.”
선생의 말을 듣다 보니 ‘인간이 만든 완벽한 타자’로 불리는 AI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현재 지적 능력이나 섬세한 기술을 요구하는 분야에서 AI는 인간을 위협하고 있고 예술 분야에서도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AI가 조만간 인간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측하는 전문가가 많은 상황에서, AI 시대 인간의 지혜가 무엇인지 물었다. “요즘 다시 ‘생명 경제’가 뜹니다. ‘지혜→지식→정보→데이터(W→K→I→D)’ 앞에 생명(L·LIFE)이 들어가 ‘L→W→K→I→D’ 도식이 됩니다. AI에 의해 역순으로 데이터에서 시작해 생명까지 가게 됩니다. 전에 없던 ‘새로운 라이프’가 생기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볼까요. 지금은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암 환자 대상의 임상실험 데이터(D)를 AI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후 의미 있는 정보(I)가 나와요.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의학 지식(K)이 형성되고, 마지막으로 보건 정책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지혜(W)가 나옵니다. 이는 WKID 도식에 없던 새로운 생명 자본의 출현을 뜻합니다. 그간 AI 혁명으로 데이터를 정보화하는 데 썼고 ‘빅데이터’를 형성했어요. 또 이 빅데이터를 지식체계로 만들었죠. 이제 이것을 넘어 생명이라는 ‘영적 마음의 세계’까지 가야 지혜가 나옵니다.”
그는 “AI로 절대 안 되는 게 있다”고 지적했다. 선생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인 ‘디지로그’를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이유다. “AI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내가 여러 번 말했지만, AI 기술을 산업현장인 공장에만 적용한다고 생각해봐요. 공장의 생산성이 올라가고 단위시간과 단위비용당 생산량이 늘어납니다. 많은 물량의 제품이 시장에 쏟아집니다. 동시에 공장 일자리는 줄어듭니다. 과잉생산, 과잉공급을 버티지 못하는 상황이 오죠. AI를 디지털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산업화 개념으로만 이해하면, AI는 오히려 인류에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디지로그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모두를 겸할 수 있죠, ‘이더 오어’(either or)가 아니라 ‘보스 앤드’(both and)가 가능한 것이죠.”
AI 시대 교육의 모습은 어떨까. 교육에는 흔히 미래 사회를 대비할 역할과 책임이 있다고 한다. 그가 그리는 미래 교육의 모습이 궁금했다. 이 선생은 ‘디지로그’ 개념을 활용, 미래 교육을 설명했다. “‘디지로그’를 하면 강의 자체는 집에서 듣고, 이 과정 이후에 아날로그식 강의를 할 수 있어요. 온라인 강의로 못 한 내용을 선생이 직접 교육하고, 아이들은 20명 정도 되는 반 친구와 프로젝트 수업을 할 수도 있죠. 디지로그 교육 방식으로 교육 제도가 바뀔 것입니다. 오프라인, 온라인 하나만 택하는 양극화가 아닌 것이지요. 양면을 쓰는 게 디지로그입니다. 접촉, 접속을 다 쓰는 것이에요. 이는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양면을 운영하면, 코로나19의 전파력도 감소하지요. 밀폐공간을 만들면, 한 학생만 코로나19에 걸려도 일순간에 확 퍼집니다. 디지로그 교육을 하면 밀폐 상황이 줄어듭니다. 덜 위험한 것이죠.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내가 10년 전부터 한 디지로그가 옳다는 게 증명됐어요. 외국에서 안 한 앞선 이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명 차원의 지혜가 아닌, ‘어르신의 지혜’는 쓰일 방법이 없을까. 학습과 경험을 통해 체화된 고령 인구의 ‘암묵지(暗默知)’를 겉으로 드러나는 지식인 ‘형식지(形式知)’로 전환하는 작업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선생은 이렇게 얘기했다. “노인의 체력은 젊은 사람에 비해 떨어지죠. 그러나 기력은 안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을 어떻게 쓰느냐. 자율자동차를 대입해 생각해볼까요. 이제 고령 인구가 엄청 큰 트럭을 운전할 수 있는 시대가 옵니다. 자율차만 되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죠. 지금 젊은이들이 운전하는 것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지금은 공사 현장에서 노인들이 시멘트를 나르곤 하는데, AI 시대가 본격화하면 나이 든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공사 현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선생은 ‘어르신의 지혜’라고 할 때의 지혜는 자신의 개념과는 동떨어진 개념이라고 했다. “어르신의 경험이라는 게 오히려 방해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내가 젊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식의 말은 지금 세대에는 통할 수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 붙잡고 6·25 때 얘기하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젊은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이런 얘기입니다. 다만, 노인 경험을 살려 자식들이나 손주들에게 인성 교육은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문명 차원, 전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지혜와 어르신의 개념은 구분해서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 이어령 선생은…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문학평론가, 언론인, 시인 등으로 활약한 이 시대의 대표 지성이다. 22세에 문단 원로들의 권위의식을 질타한 ‘우상의 파괴’를 발표해 등단했다. 서정주 등 문학계 거물들과 논쟁하며 저항문학을 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지성에서 영성으로’ ‘생명이 자본이다’ 등의 명저들을 통해 시대의 화두를 제시했다.
손기은 기자 s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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