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왕등도, 세상에 나쁜 섬은 없다

김민수 2021. 1. 14.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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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등도 선착장

상왕등도 그 섬으로 가겠다던 굳은 다짐은 집을 나와 고속도로로 접어드는 순간,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못 나오면 어떡하지?’ 지금껏 수많은 섬을 여행하면서, 매번 다음 순서라고 미루며 핑계를 댔던 이유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두 번의 기회로 닿는 섬

일주일에 오로지 두 번 여객선이 다니는 섬. 혹시나 기상이 안 좋아 결항이라도 된다면 일주일을 오롯이 갇혀 있어야 하는 섬. 수년 전부터 꼭 가 보리라 다짐해 놓고도 아직 미지로 남은 섬. 그 섬의 이름은 왕등도다.

위도에서 왕등도까지 거친 파도를 타고 이어지는 뱃길

변산반도 격포여객선터미널, 이곳은 위도를 오가는 섬 주민들과 여행객들의 관문과 같은 곳이다. 격포에서 위도까지는 한 시간, 위도에서 왕등도까지는 다시 한 시간이 소요된다. 바다로 떠난 여객선이 승객 대부분을 위도에 내려 주고 나니 객실에는 눈으로 셀 수 있는 정도의 사람만 남았다. 청명한 날씨 덕분에 상왕등도와 하왕등도 두 개의 섬, 그리고 주변 무인도들의 모습이 또렷하게 다가왔다.

●막막해도 답은 있다

격포에서 32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왕등도는 사람이 사는 하왕등도와 상왕등도, 그리고 3개의 무인도로 이뤄져 있다. 그렇지만 면적이 가장 큰 하왕등도도 선착장 부근의 가옥 네다섯 채를 제외하면 거의 무인도와 다름없는 섬이다. 하왕등도에 잠시 멈춰 섰던 여객선은 시계방향으로 돌아 다시 상왕등도로 향해 갔다. 섬 주변으로 많은 낚싯배가 진을 치고 있었다. 왕등도 지역은 낚시 애호가들에게는 손꼽히는 출조지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는 난류성 어종인 문어가 대량으로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고도 낚시 열기가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단다.

담수장 주변은 옛 학교 터로 야영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에는 정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함께 내린 사람들이 목적지를 찾아 모두 사라진 뒤에도 한참이나 그곳을 떠나지 못했던 것은 첫 섬에 대한 막막함 때문이었다. 2박 3일을 민박과 캠핑으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유일한 민박으로 알고 왔던 건물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결국, 이 섬에서 먹고 자는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일단 높은 곳으로 올라 야영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경사진 마을길을 따라 5분 정도 올랐을까. 별안간 발전소가 나타났고, 그 건너편 담수장 주변으로는 비교적 넓고 편평한 초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부근에 수도 시설까지 갖춰진 데다 뒤편으로 바다가 펼쳐진, 더할 나위 없는 야영지였다.

천혜의 낚시 스폿으로 주목받는 하왕등도
밋밋한 능선으로 이어진 상왕등도와 인접한 하왕등도

●방해하는 자, 방해 받는 자

면적 0.57km2에 불과한 섬, 상왕등도. 그 모습이 서서히 눈에 익기 시작했다. 등대로 가는 길은 담수장 아래에서 시작됐다. 계절이 바뀌었지만, 햇살은 따사로웠고 곳곳에는 푸르름이 남아 있었다. 발바닥에서 흙과 나뭇잎의 감촉이 푹신하게 전해져 왔다. 섬 여행의 즐거움은 내 것이 된 자연과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한적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무인등대로 가는 길은 야생 염소의 자유로운 놀이터다

그렇게 걷던 도중, 누군가 앞길을 막아섰다. 야생 염소 서너 마리였다. 인기척에 화들짝 놀란 염소들은 갑자기 등장한 인간들을 빤히 쳐다보다 무리 속으로 도망쳐 갔다. 여행자의 평온함은 그곳에 사는 누군가의 평온함을 깨뜨리고 얻어지는 걸까. 미안해진 마음에 큰 소리로 외쳤다. “염소야, 미안해!” 미안함을 뒤로하고 도착한 곳은 섬의 최고점. 240m에 불과한 낮은 높이지만, 그 꼭대기에 자리한 자그마한 무인등대는 꼿꼿하게 서서 위용을 떨치고 있다. 바다 건너 동쪽으로는 위도와 그 너머 변산반도가, 남쪽으로는 안마군도가 또렷하게 조망됐다.

물이 빠지면 구멍이 더 커지고 홍합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물이 빠지면 먹을 것 천지

상왕등도에는 신우대가 유난히 많아 섬의 남쪽으로는 산을 뒤덮고 빼곡한 숲을 이룰 정도다. 과거 보리농사를 지었던 섬 주민들이 방풍을 목적으로 심었던 것인데, 사람들이 하나둘 섬을 떠나고 방치되면서 결국 밭 대부분은 신우대 차지가 되었다.

기기묘묘한 암석들의 전시장, 상왕등도 해안

해안은 마치 커다란 바위로 만든 조형물들의 전시장과 같았다. 오랜 시간에 걸친 지각변동, 그리고 바람과 파도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기막힌 조형물들은 사람의 얼굴과 동물의 형태를 빼닮았다. 육면체의 바위 위에 바위를 얹어 놓은 듯한 모습은 방상절리가 분명했다. 모진 파도는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내고 초록의 신비한 빛을 그 속에 띄우기도 했다.

거북손은 전복과 소라를 섞어 놓은 듯한 식감과 맛을 가지고 있다

물이 빠지면서 해안의 바위틈으로 거북손 군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닷속에 있던 큼직한 토종홍합도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왕등도 홍합은 섬 어촌계에서 권한을 위임받은 업자가 일정한 때에 모두 채취해 간다. 다행히 바다가 숨겨 놓은 홍합들이 남아 있었다. 업자의 간택을 미처 못 받은 홍합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속을 꽉 채우고 맛을 더욱 키워 냈다. 덕분에 여행자의 입은 호강했다.

인적 뜸한 이른 아침의 상왕등도 해안길

●낚시쯤 못해도 괜찮아

왕등도의 태양은 망망대해 끝으로 지고 위도 너머로 오른다. 왕등도의 서쪽 바다 끝은 중국 땅이다. 충남의 외연도, 어청도에서 들린다는 중국의 닭 울음 이야기가 이 섬에서도 전해지는 이유다. 위도 사람들에게 왕등도는 하루의 끝을 상징하는 섬이다. ‘왕등낙조(위도에서 바라본 왕등도 낙조)’는 위도 8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그런데 왕등도에서 바라보니 이곳 주민들의 하루도 역시 위도로부터 시작된다. 단순하지만 미묘한 자연의 이치다.

상왕등도의 산증인이자 민박 식당을 운영하는 노병업씨(74) 부부

10여 가구가 산다는 마을은 조용했다. 겨울이 되면서 뭍으로 나간 주민들이 많았던 까닭이다. 함께 들어온 낚시꾼들의 숙소가 궁금해서 찾아보다 민박집 한 곳을 발견했다. 잠자리야 텐트를 이미 마련해 뒀으니 해결된 셈이고, 섬 밥상 한 끼 정도 먹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주인장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허락이 떨어졌다. “점심으로 준비해 줄까? 아니면 저녁으로?” 순간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같은 값이라면 낚시꾼들이 돌아오는 저녁, 혹시나 생선회를 나눠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너무도 아름다웠던 상왕등도의 해넘이 풍광

아니나 다를까, 주인장과 마주 앉은 저녁 밥상에는 두툼한 생선회와 매운탕이 놓였다. 우럭과 참돔으로 추정되는 자연산 생선회는 찰기부터 달랐다. 큼지막한 생선뼈가 들어간 매운탕도 좋았지만, 주인장이 직접 담갔다는 돌게장의 맛은 가히 압권이었다. 최고의 밥상, 가격은 단돈 만 원. 민박집은 ‘게장 맛집’으로, 상왕등도는 낚시를 전혀 못 하는 사람도 맛있는 생선회를 먹을 수 있는 ‘행운의 섬’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코로나 시대, 언택트 여행을 지향한다면 섬이 훌륭한 대안이 돼 줄 수 있다. 해외여행에 들인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에서 못 갈 섬은 없다. 이미 관광 인프라가 완벽하게 갖춰진 섬도 좋지만, 조금 낯설어도 부딪히며 알아 갈 수 있는 모험의 섬은 어떨까. 세상에 나쁜 섬은 없다.

여객선 | 주 2회(매주 화ㆍ목요일)
격포여객선터미널 063 581 1997
숙박 문의 | 상왕등도민박식당 010 4143 0448

글ㆍ사진 김민수(아볼타) 에디터 곽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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