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한겨울 밤의 꿈

한겨레 2021. 1. 14.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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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최현우의 오늘의 날씨]선생님께 보내는 편지
공연장 데려간 선생님의 의도
어른이 된 지금 가슴에 남아
추악한 일 많은 세상에도
나를 지키고 나아가게 하는 것
클립아트코리아

선생님,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엉뚱한 공연이었어요. 한겨울에 보았던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뮤지컬은요. 제 인생에서 처음 보았던 뮤지컬이었지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선생님은 당신의 가족과 함께 가는 공연장에 저를 데려가셨죠. 네가 이것을 꼭 보았으면 좋겠다면서요. 아주 평범한 보통의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선생님이 내미는 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알쏭달쏭한 편애였습니다. 다른 친구들 몰래 제게만 주셨던 선생님의 관심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마음이요. 그 시절은 지금까지도 제가 가진 가장 밝은 비밀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저는 겨울에도 한여름을 떠올립니다. 선생님의 부스스한 머리칼과 크고 투명한 눈빛을 꼭 여름처럼 환하게 기억하면서요.

오랫동안 전하지 못한 편지를 이제야 적어봅니다.

교실 창밖에 눈 덮인 운동장이 하얗게 튕겨내는 겨울 햇빛을 멍하니 보던 날들이었습니다. 그해 겨울의 일은 전부 기억나지 않지만, 학교 앞 문방구에 새로 들어온 오락기 때문에 유독 설레고 추웠던 겨울로 기억합니다. 오락기 앞에 놓인 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으면 쌓였다가 녹은 눈 때문에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었기 때문이죠. 저는 그 게임을 일주일에 한 판이나 두 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용돈이란 건 언제나 부족한 거니까요. 기회비용이라는 개념을 우리는 그 시절 이미 다 배웠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머지 시간은 다른 애들이 하는 걸 구경하느라 저녁이 오는 줄도 몰랐지요. 한 무리의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다가 멀리 교문에서 걸어 나오는 선생님들이 보이면 사자를 피해 도망가는 아프리카 가젤들처럼 잽싸게 흩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암묵적으로 가장 늦게 합류한 아이가 망을 보는 식으로 규칙이 생겼지요. 어쩌면 그 긴장감이 우리를 더욱 오락기 앞에 붙들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시절이 평범하게 사라지는 조용한 겨울이었습니다. 6학년 3반으로 만났던 선생님과의 시간도 끝나고 있었고요.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잠시 남아 있으라는 말에 온갖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절 제가 저지른 죄의 목록 중에서 선생님과 독대해야 할 만큼 위중한 것은 무엇인가. 감추려 했던 것은 무엇이고 들키고 만 것은 무엇인가. 혼자서 잔뜩 졸아붙은 채로 교탁으로 다가갔을 때 선생님의 미소를 보고 들었던 안도감이 기억납니다. 방학하고 2주 뒤에 함께 어디를 가자는 말에 쭈뼛거리는 저를 보던 선생님의 눈빛이 기억납니다. 제가 가진 열화된 기억으로나마 그때의 눈빛이 어떤 말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처음으로 레스토랑에 가서 피자를 먹었고요. 피자를 파는 곳에서 피자만 파는 게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알았고요. 뮤지컬이라는 것도 처음 보았습니다. 분장을 한 어른들이 시시각각 번쩍거리는 조명 아래에서 연기와 노래를 하는 광경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순하게 개작을 했다지만 내용이 어려웠지요. 어떤 대사가 들었는지 지금도 다 생각나지 않습니다. 관람을 마치고 집 앞까지 태워다 주시는 차 안에서 저는 난감했습니다. 재밌었냐는 질문에 재밌었다는 짧은 대답이 망설여졌지요.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저는 불편하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선생님 가족이 주고받는 즐거운 식사와 다정한 대화가요. 그때의 저는 겪어보지 못한 풍경이었습니다. 도무지 어색해서 자연스럽게 참여하지 못했지만, 알게 모르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제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뮤지컬이 아니라 가족의 모형이었다는 걸. 어렵고 불행하지 않은 가족의 모습이 제게 필요하다고 여기셨다는 걸 이제는 이해합니다.

이후 살면서 저는 많은 스승을 만나고 헤어졌지만 특별하게 기념할 만한 만남은 많지 않았습니다. 제가 살면서 만난 대부분의 스승은 제게 세상을 향한 불신과 환멸을 교육하기도 했지요. 선생님을 찾지 않았던 이유도 그랬습니다. 어른들의 무시와 폭력을 반사하는 일에 골몰했던 사춘기 내내 선생님이 제게 심어두신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지요. 졸업하는 날, 직접 손뜨개로 만드신 물병 주머니와 함께 주신 카드에는 뮤지컬의 대사가 기억나느냐고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천하고 멸시할 만한 것이라도, 사랑은 훌륭하고 품위 있는 것으로 바꾸어준답니다.’

그때는 저 말의 의미도 모르고 단어도 어려워서 대충 외우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저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진 않지만, 카드와 더불어 학부모에게 전달하라고 주신 생활기록부에 적혀 있던 말들은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예민하고 영민합니다. 그런데 슬픔이 많습니다. 가족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봐도 좋은 말이 아닌 거 같아서 부모님께 안 드리고 며칠을 펼쳐보며 고민하다가 몰래 버렸거든요.

선생님, 저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아마 상상도 못 하시겠지요. 제가 저를 감당하고 해결하려다가 찾은 방식이었습니다. 사람을 돕거나 아프게도 하고, 착한 일과 나쁜 일도 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나 막연하고 무책임해서 여전히 싫습니다. 차마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보기도 했고요. 몹시 두렵고 자신 없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범하고 보통의 일들을, 상상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제법 지내면서 연애도 해보았고요, 결혼도 해보려고 합니다. 아마 머지않은 날에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 결심을 하는 날도 오겠지요. 가족을 만든다는 상상이요. 그래서 생각이 났습니다. 훌륭하고 품위 있게. 그러기 위해 필요한 행동과 의미를 제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배운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요. 마치 꿈에서 누군가 가르쳐준 것처럼, 그렇게요.

2020년은 송구영신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통째로 누군가 인류에게 던지는 어떤 질문 같았지요. 인간이 이대로 존속해도 괜찮은 것인지, 질책 같기도 했습니다. 병이 사람의 몸과 마음에 도는 와중에 세상은 악한 쪽으로 기우는 듯 보였습니다. 악마의 거울에는 인간만이 들어 있다는 말도 있지요. 생명을 포기하거나 빼앗기는 사람들이 줄지를 않습니다. 괴롭히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고통 속의 사람을 조롱하는 일이 이렇게 쉬워질 수 있을까요. 최근에는 입양한 아이를 아무렇지 않게 죽음으로 밀어 넣은 부모가 있었습니다. 저는 가능하면, 모두 외면하고 싶습니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일들에 침묵하는 게 궁극적인 선의라는 핑계가 제게는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마음은 그게 아닐 겁니다. 알고 싶지 않은 겁니다. 저들의 추악함이 곧 나의 추악함일까 봐, 세련되고 은밀하게 눈을 돌리고 적당히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겨울은 가끔 눈으로 모든 걸 덮지만 끝까지 덮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났습니다. 그날 보았던 뮤지컬은 꿈과 환상의 것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살면서 겪는 행운과 불행이 두껍게 덮여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제게 만들어 주신 겨울의 일일 겁니다.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어른만이 그들의 세계도 훌륭하고 품위 있게 바꾸어 나가겠지요. 그런 어른, 저도 될 수 있을까요. 조금은 노력하며 살았던 것 같은데,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계속해서 자신 없는 일일 겁니다. 문득 지금의 저를 보며 당신께서 어떤 말을 하실지 두렵고 궁금합니다.

어디선가 이 편지를 읽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울입니다. 또 어딘가에서 그렇게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습들을 가진 선생님이 계시겠지요. 손뜨개를 하며, 다정한 일들을 일으키는 사람이요. 그것을 믿어보려고 합니다.

새해니까요. 우리 모두의.

겨울이 지나면,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최현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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