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그 탈북은 착한 탈북”

이벌찬 기자 2021. 1. 1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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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이라고 다 같은 탈북이 아니에요.”

TV조선 프로그램 ‘모란봉클럽’에 패널로 출연하며 만난 탈북민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똑같이 두만강·압록강을 넘어가도 목적지가 ‘중국이냐 한국이냐’에 따라 처벌 강도가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중국에 가서 밀수품을 들여오다 걸리면 ‘착한 탈북’으로 인정돼 뇌물로 무마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행을 시도하다 잡히면 관리소(정치범 수용소) 수용 대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해외 송수신이 가능한 휴대폰 소지는 북한에서 불법이지만, ‘위챗'(중국판 카카오톡)이 깔려 있으면 외화벌이 일꾼이라 여겨 감형하고 ‘카카오톡'이 설치돼 있으면 배반자로 간주해 강력 처벌한다. 북한은 2010년 5·24 조치와 2016년 시작된 고강도 대북 제재로 인해 중국과의 공식·비공식 교역이 유일한 생명줄이 됐다. 북한이 한국으로의 탈북은 기를 쓰고 막으면서도 중국에는 국경을 반쯤 열어두는 이유다.

이 때문에 탈북민의 중국행과 한국행은 난도가 완전히 다르다. 중국행은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지만, 한국행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함경북도 밀수꾼이었던 탈북민은 “두만강 강폭이 좁은 곳은 70m 정도라 강 건너 중국 상점에 종종 들러 생필품을 사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제3국을 통한 한국행을 시도했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힌 이후에는 9번을 더 북송당하고서야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한국행 탈북 브로커 비용도 지난 10년간 3배 가까이 올라 1인당 1000만~1800만원에 달한다.

그러나 목숨 걸고 한국에 온 탈북민에 대한 우리의 대우는 형편없다. 올해 통일부의 탈북민 정착 지원 예산은 전년 대비 54억원(13.9%) 삭감됐다. 코로나 장기화로 탈북민 입국자 감소를 예상해 결정한 것이라지만, 북한 정권 눈치 보기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몇 년 새 탈북 단체들에 대한 통일부의 ‘탈북민 정착 사업비’ 지급액은 반 토막이 났고, 국정원·경찰 예산으로 지원금을 받던 탈북자 단체들도 지원이 끊겼다. 미 국무부는 지난해 3월 인권보고서에서 “한국 정부가 북한과 대화에 나서면서 탈북 단체들은 ‘정부로부터 대북 비난을 줄이라는 직간접적 압력을 받고 있다’고 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달 29일 공포된 ‘대북전단금지법’은 우리 정부가 탈북 단체 입막음에 얼마나 적극적인지 숨김 없이 보여줬다. 북한에 전단·USB 메모리 등을 살포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한 이 법은 북한 주민들의 눈과 귀를 막아 한국행 탈북을 결심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한국에서 제정한 법이 아니라 ‘1호 교시’ 같다.

탈북민들을 푸대접하면 어떤 결과가 기다릴까. 결국 탈북민들은 목숨 건 한국행보다 중국행을 더 많이 선택할 것이다. 중국에 동화되는 탈북민이 많아질수록 북·중 간 거리는 더욱 좁아지고, 남북의 거리는 더 멀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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