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사는 게 뭐길래] 새해 첫날, 좋아하던 팝송의 가사를 외웠다

장강명 소설가 2021. 1. 1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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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 성취 헌신 안분지족.. 새해 첫 질문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봉우리 높으면 골짜기 깊듯 영광과 짜릿한 기쁨도 결국 한순간
웃고 노래하고 허리 펴고 걸으며, 그 시간의 품질 높이련다

새해에는 지난해보다 더 좋은 삶을 살고 싶다. 그런데 좋은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다 보면 먼저 좋은 삶이 뭔지 규정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조금 뒤에는 형이상학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여태까지 쭉 그래왔다. 사색하는 재미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주관적으로 느끼는 쾌락의 총량을 최대화하는 삶? 종교 경전에 적힌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삶? 성취를 거두고 업적을 남기는 삶?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희생하는 삶? 주변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안분지족하는 삶? 누가 어떤 답안을 제시하건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을 것 같다. 성취와 업적은 상당 부분 운에 달렸는데 그게 삶의 좋고 나쁨까지 결정한다는 말이냐, 본인이 만족하고 주변으로부터 존경받는다면 사이비 종교 중간 간부의 삶도 괜찮단 말이냐, 하는 식으로.

일러스트=이철원

그래서 최근에는 그 모든 요소가 비빔밥처럼 잘 섞여 있는 게 좋은 삶 아닐까,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지 않을까, 하는 잠정 결론에 이르렀다. 선량하게 살면서 여러 가지 즐거움을 맛보고, 성취도 거두고, 봉사도 하고, 사랑도 하고, 우정도 쌓고, 이것저것 다 하련다! 무슨 칵테일 요법처럼 들리기는 한다.

한편으로는 논리와 무관하게, 좋은 삶에 대한 막연한 직관들이 있다. 설령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최신 자동차와 명품 가방에 너무 매달리는 삶은 좋은 삶이 아닐 것 같다. 자연과 예술을 감상할 줄 알고, 불운을 겪어도 의연함을 지키는 삶이 좋은 삶일 것 같다. 하지만 왜 그런가 하고 물으면 딱 부러지게 설명할 자신은 없다. 그런 막연한 직관 중에는 ‘좋은 삶이 무엇인지 적정량을 고민하는 것이 좋은 삶의 조건 중 하나 아닐까’ 하는 것도 있다.

추상적인 질문에 파묻혀 눈앞의 삶을 외면하는 것도 딱한 일이지만, 삶의 방향성을 놓고 아무런 고민이 없는 사람은 한심하거나 무섭게 느껴진다. 무슨 짐승이나 기계 같지 않은가. 세밑에 그런 고민거리를 안주 삼아 아내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좋은 삶에 대한 접근 전략을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나는 좋은 삶을 이루는 커다란 요소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굵직굵직한 가치들을 추구하다 보면 내가 누리는 시간들이 덩달아 가치 있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방식은 성장 거점을 정한 뒤 그곳에 집중 투자하는 지역 개발 계획과 닮은 데가 있다. 몇몇 봉우리를 높이려 애쓰면 다른 부분도 덩달아 융기하리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목표 의식이 분명하면 과정의 불쾌함을 견뎌낼 힘도 생긴다. 니체도 그런 말을 했고, 빅터 프랭클 박사의 로고세러피도 대강 그런 내용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삶이 여러 과목의 숙제들을 작성하는 일의 연속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엄숙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한눈팔지 않고 좋은 가치들을 성실히 추구하려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순간이 다 강렬하고 충만하지는 않다. 오히려 봉우리가 높아지는 만큼 골짜기도 깊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봉우리가 아닌 시간들에 좀 더 애정을 갖고, 그 순간들의 품질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의 고도는 가장 우뚝 솟은 봉우리의 높이로 정한다. 하지만 어느 나라가 얼마나 잘사는지를 평가할 때 그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를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좋은 삶도 그런 것 아닐까?

영광의 순간이 있다면 좋겠지만 누구도 거기에 머물러 살 수는 없다. 짜릿하고 즐거운 시간도 지나간다. 결국에는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수롭지 않은 순간, 평범하고 시시한 시간들의 온도를 어떻게 하면 조금씩 높일 수 있을지 궁리했다. 심리학자들과 뇌 과학자들의 조언이 참고가 됐다. 인간의 마음은 행동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을 짓고 노래를 부르면 실제로 기분이 좋아지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 감사한 마음이 들며, 허리를 펴고 성큼성큼 걸으면 생활에 활력이 생긴다고.

올해 나는 그런 습관을 들여 보기로 했다. 새해 첫날에는 평소 좋아하던 팝송의 가사를 외웠다. 심심할 때 부르기 위해서다. 재미있었다. 어릴 적에는 가사를 암기하는 곡이 그렇게 많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고 놀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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