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왕비가 흑인? 재즈는 흑인만?.. 국내서도 '블랙 워싱' 논란
"원작과 달리 무조건 흑인 등장, 개연성 떨어지고 몰입 방해" 비판
서양 주류영화계 "백인 치중 반성".. 흑인 내세워 '다양한 인종존중' 강화
색다른 요소로 관객 창출에도 한몫
영화 ‘소울’의 제작진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최초로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흐름 때문이 아니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인종 차별이나 정치적 올바름(PC) 문제를 의식해 꼭 필요하지 않은 설정임에도 억지로 흑인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지적을 부인한 것. 제작진은 “타당한 우려는 맞지만 문맥에 따라 다르게 봐야 한다. (그동안 흑인을 등장시키지 않았던) 단점을 알고 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고 했다.
20일 개봉하는 소울을 계기로 이른바 ‘블랙 워싱’ 논란이 일고 있다. 블랙 워싱은 할리우드 등 서양 주류 영화계에서 무조건 백인 배우를 기용하는 관행인 ‘화이트 워싱’에 견준말이다. 인종적 다양성을 추구한다며 작품에 무조건 흑인을 등장시키는 추세를 비판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간 이런 논란은 흑인의 인권 문제에 예민한 서구 사회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해외 콘텐츠가 많이 소비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도 늘고 있다.
지난해 12월 25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도 논란의 대상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1800년대 영국 런던이지만 왕비 역을 맡은 배우 골다 로슈벨은 흑인이다. 남자 주인공 사이먼 역시 흑인 배우 레지 장 페이지가 맡았다. 한국 시청자들 사이에선 “영국 왕비가 흑인으로 등장해 몰입을 방해한다” “드라마의 배경이 된 원작 소설에서 사이먼은 파란 눈을 지닌 백인으로 묘사되는데 설정이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왔다.
물론 흑인이 등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블랙 워싱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대 배경이나 원작의 취지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흑인을 등장시키면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2018년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트로이: 왕국의 몰락’은 그리스의 신인 제우스와 그리스인인 아킬레스를 흑인으로 설정해 무리수라는 지적을 받았다. 애니메이션을 영화화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2019년 7월 디즈니가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실사 영화에 흑인 배우 핼리 베일리를 캐스팅하자 ‘#나의 아리엘이 아니야’라는 반대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최근 영화계가 흑인을 내세우는 건 다양한 인종을 존중하자는 할리우드의 흐름 때문이다. 백인들만 등장한 영화가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에 대한 반성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백인에게 치우친 캐스팅에 대한 자성의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라며 “애니메이션에 다양한 인종이 등장하면 이를 자주 보는 아이들이 편협한 시각을 갖지 않게 만든다”고 했다.
색다른 요소로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점도 여러 이유 중 하나다. 가수를 꿈꾸는 멕시코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코코’(2018년)는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다루지 않던 남미를 배경으로 해 관객들로부터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코코’가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상을 수상한 배경에도 다양성을 반영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았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단편적으로 논란에 휩쓸리기보다는 흑인 캐스팅이 영화 흐름에 맞는지 관객이 판단하며 작품을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공부벌레… 수전노… 할리우드, 아시아계 편견 못벗어나
미국인이 만든 ‘미나리’도 차별 “영화제작진에 한국인 포함돼야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인 표현”
198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이주한 한인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미나리’가 올해 골든글로브에서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일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한국계 미국인인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이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제작사는 브래드 피트가 공동 대표인 플랜B다. 그럼에도 규정상 영화 대사의 50% 이상이 영어가 아니라며 외국어 영화로 분류된 것이다.
그러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년) 영화는 대사의 영어 비중이 30% 정도임에도 골든글로브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감독과 배우가 백인이 아니라고 해서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인종차별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2019년엔 중국계 미국인인 룰루 왕 감독이 중국계 이민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페어웰’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분류된 적이 있다.
아시아인이 등장하더라도 동양에 대한 서양의 시각이 드러나는 ‘오리엔탈리즘’이 녹아 있다. 영화 ‘시리어스맨’(2010년)에서 한국인은 낙제점인 F학점을 수정해달라고 요구하는 등 한국인은 공부벌레로 표현되곤 한다.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년)처럼 돈밖에 모르는 부자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백인이 주류인 서양권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동양인 갑부들의 이야기’로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지만 동양권에선 ‘뻔한 신데렐라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며 흥행에 실패했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아인이 소외되는 흐름을 바꾸기 위해선 영화 제작진에 아시아인이 포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흑인과 멕시코인 제작자들이 할리우드 작품을 만들면서 편견을 극복해나간 것처럼 제작하는 이들이 차별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영화 ‘기생충’을 계기로 할리우드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며 “제작 시스템에 한국인이 포함돼야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한국인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것”이라고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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