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김영춘의 담쟁이(2)
[경향신문]
2005년 가을이었던 것 같다. 열린우리당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2004년 총선 승리 후 10년 가까이 이어졌던 패배의 행진을 막 시작하던 때였다. 나중에는 비상대책위가 선거 패배 때마다 되풀이하는 푸닥거리 같은 것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비감한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첫 회의가 열렸다. 비대위원들 앞으로 발언 차례가 옮겨갈 때마다 카메라 플래시가 작렬했다. 젊은 국회의원 김영춘이 마이크를 당기며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그가 목소리를 떨며 읊었던 도종환의 시 ‘담쟁이’로부터 기운을 제대로 받지 못했는지 열린우리당은 몇 년 후 결국 깃발을 내렸고, 김영춘은 스스로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면서 표표히 여의도를 떠났다. 이렇게 담쟁이 기억을 다시 소환하는 것은 지난 화요일 김영춘이 부산시장 출마선언을 하는 모습이 ‘담쟁이’를 읽던 시절의 데자뷔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비장하고 진지했다. “서울공화국과 싸우는 게임체인저가 되겠다”고 했다. 그리고 “부산의 운명을 바꾸겠다”고 했다. 저런 심각한 표현을 늘 쓰기로는 지금 통일부 장관 하고 있는 이인영 다음으로 김영춘이라는 것을 이번 출마선언에서도 확인한 셈인데, 그의 출마선언을 들으면서 문득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다. 부산시장 선거를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담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절망의 벽’이란 무엇인가?
‘어쩔 수 없는 절망의 벽’이란 우리나라의 강고한 중앙집권체제일 것이다. 일제하 총독부 권력으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분단체제에서 반공안보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지속되었고, 국가주도 자본주의 성장과정에서 강화된 초집중체제는 군부권위주의 지배가 오랫동안 지탱해왔다. 이것은 마을에서부터 최고 권력에 이르기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소용돌이국가를 만들었다. 중앙집권체제는 정치권력, 자본, 국가 관료체제 등 각종 기득권의 동맹체제였다.
민주화세력은 이를 넘어서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것이 1991년에 회복한 지방자치 선거였다. 올해로 30년,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중앙집권체제의 민주화는 얼마나 진전이 되었나? 그다지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중앙집권세력은 여전히 강고하고, 지방은 그들에 의해 계열화된 토호들이 세를 이루고 있다. ‘절망의 벽’은 여전히 강고하다. 이처럼 우리가 ‘절망의 벽’이라고 느끼는 이 현실을 좀 더 간절하게 고발할 수 없는가? 이 기득권을 해체하여 국가 재구조화를 해야 나라의 미래가 열린다는 자치분권 비전을 좀 더 강력하게, 분명하게 말할 수 없나? 김영춘뿐만 아니라 부산시장 출마자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고 ‘말없이 그 벽을 오르는 담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지방’의 연대가 만드는 힘이 아닐까. 모두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고 했다. 작은 지방의 힘들이 모여 큰 힘을 만들고 그것으로 강고한 중앙집권체제를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부산이 같은 처지에 있는 지방의 힘을 엮어서 큰 힘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산 혼자서는 그것을 해낼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말이다.
부산은 우리나라의 가장 큰 지방도시다. 부산은 울산·경남뿐만 아니라 대구·경북과 함께 그리고 광주·전남북과 더불어 살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크고 열린 그림을 그릴 때만 길이 보일 것이다. 부산 혼자 이룰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오랜 세월 유지되고 있는 강고한 중앙집권체제의 기득권, 넘을 수 없는 절망의 벽과 괄목상대하기 위해서는 부산이 다른 여러 지방과 상생하고 연대해야 한다. 이것이 ‘담쟁이’가 의미하는 바이다. 큰 부산이 능사가 아니다. 큰 지방이 필요하다. 부산시장은 부산만 껴안고 부산만 챙기는 부산의 시장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부산도 살릴 수 있다. 김영춘이든 박형준이든 이언주든 부산시장이 되려는, 내가 아는 지도자들 모두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다.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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