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침묵의 재발견
[경향신문]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 독일작가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이렇게 썼다. “예전에는 침묵이 모든 사물을 뒤덮고 있었고, 그래서 인간은 한 대상에 다가가기 이전에 먼저 그 침묵의 막을 뚫고 나가야 했다. 사상과 사물은 그것들을 둘러싼 침묵에 의해서 보호되었고, 그리하여 인간은 그것들의 급박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이 사라진 오늘날 인간은 오히려 더 이상 능동적으로 사상과 사물을 향해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것들이 인간에게 달려들어 인간 주위에서 소용돌이친다. 인간은 이미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생각되는 대상이 된 것이다.” 침묵은 의외로 수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생각과 사물이 달려들어 우리를 점거하지 못하도록 막는 사이, 천천히 능동적인 시도를 꾀할 수 있는 바탕이었다. 침묵을 잃으면서 우리는 오히려 사물이 되었다.
함석헌의 침묵.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함석헌 선생의 시가 있다.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 이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 세상의 냄새가 들어오지 않는, 은밀한 골방을 가졌는가? (…) 그대 맘의 대문 은밀히 닫고, 세상 소리와 냄새 다 끊어버린 후, 맑은 등잔 하나 가만히 밝혀만 놓으면, 극진하신 임의 꿈같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네.” 선생에게 고독과 침묵은 들리지 않던 소리, 신과 진리의 꿈같은 소리를 듣게 해주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 소리는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이반 일리치의 침묵. 현대문명의 급진적인 비판가 일리치는 <깨달음의 혁명>에서 이렇게 말한다. “단어와 문장은 소리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진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리와 말들 사이에 들어있는 침묵의 순간들은 태양계 안의 행성들처럼 광활한 진공 속에서 빛을 발하는 점입니다. 공자도 언어가 바퀴와 같다고 했습니다. 바퀴살이 모여 수레바퀴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실은 그 사이의 빈 공간이 바퀴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침묵의 다른 이름은 경청입니다. 시골버스에 오른 당신에게 어느 할머니가 옆집 염소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말해준다면 그것은 하나의 선물, 당신을 받아들이겠다는 신호입니다.” 일리치는 침묵의 단계를 순수하게 듣는 침묵, 공명하는 침묵, 사랑의 침묵으로 나누면서 침묵이란 웅변보다 더 큰 의미를 발신하는 화법이라고 했다.
퀘이커의 침묵. 퀘이커교는 가시적 형태의 교회도, 성직자도, 예배와 전례도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임’이라 부르는 그들의 예배는 침묵으로 이루어져 있다. 긴 침묵 끝에 누군가 일어나서 느끼고 생각한 바를 짧게 이야기하면 예배는 끝이 난다. 중요한 것은 침묵이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신의 ‘성스러운 빛’이 있으므로, 침묵의 집단적 공유 속에서 진리를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퀘이커들은 침묵이야말로 이 진리를 듣게 하려는 신의 선물이라고 믿는다. 한때 퀘이커주의자였던 함석헌 선생이 골방에서 듣고자 한 소리도 아마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코로나19에 따른 거리 두기 단계 강화로 갑갑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세상일에는 언제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 존재한다. 식당과 술집이 문을 닫고 거리에는 배달 라이더들만이 추운 날씨 속을 바삐 달리지만, 우리는 조금 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조금 더 혼자 있게 되었다. 거리 두기를 따르다 보니 오히려 그토록 바쁘고 시끄러웠던 일상이 비정상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위기는 언제나 약자에게 먼저 찾아오는 법이어서 고통받는 중소상인과 저소득층이 걱정이지만, 우리 삶은 힘겨운 대로 다시 재조립되어야 할 기회를 맞은 것 아닐까. 강제적인 단절과 침묵의 시간에서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침묵이 나의 자유와 자기 혁신을 위한 선물이라는 것을. 새해에는 나도 조금 더 침묵하고자 한다. 믿지는 않으시겠지만.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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