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창작자에게 가점을 주면 '역차별'일까?..영진위 '성평등 지수' 살펴보니

김지혜 기자 입력 2021. 1. 13. 22:03 수정 2021. 1. 13.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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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창작자 가점 주는 '성평등 지수' 논란에 들여다본 영화계 현실

[경향신문]

“남성 역차별 도와주세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 가산점.”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게시되고 있는 ‘호소글’의 제목이다. 글에는 올해부터 지원사업 심사에 ‘성평등 지수’를 도입하기로 한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의 결정이 남성 지원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역차별이며, 제도 철폐를 위한 여론을 모아달라는 주장이 담겼다. 지난달 게시돼 615명이 동의한 청와대 국민청원 “영진위 ‘성평등 지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합니다”의 청원인 역시 “국가기관의 심사에서 작품 자체가 아니라 창작자의 성별에 따라 차등을 주는 것은 공정성과 거리가 멀다”며 제도의 전면 재검토를 요청했다. 일부의 우려대로 성평등 지수 도입은 공정성을 저해하는 역차별 정책일까? 아니면 남성 중심적으로 편향된 한국영화계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평등의 씨앗일까?

제도의 내용은 이렇다. 영진위는 올해부터 한국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한국영화 기획개발, 독립예술영화 제작지원(장·단편 극영화/다큐멘터리) 등 영진위가 지원하는 사업 심사에서 여성이 감독·프로듀서·작가로 참여하거나 여성 주연작인 공모작에 가산점을 1~3점, 최대 5점을 주는 ‘성평등 지수 가산점’을 도입했다. 심사위원들이 작품 평가를 마친 이후 가산점을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이다. 영진위는 지난달 사업설명회에서 “한국영화산업 핵심 창작 인력에서 과소 대표된 여성 인력과 여성 주도 서사 비율을 늘려 성별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다양성을 확보하고, 경력이 단절된 여성 인력을 적극적으로 유입해 참신성과 창조성을 확대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2018년 9월 미투 운동의 열기 뒤로 영진위 산하에 만들어진 한국영화성평등소위원회(성평등소위)가 2년여의 연구와 합의 끝에 도출한 제도다.

개봉영화 여성 감독 11.5% 불과
대학·아카데미 배출 인력 많지만
현장 핵심 역할서 구조적 배제

영진위가 설명한 ‘과소 대표된 여성 인력’의 현실은 숫자로 드러난다. 지난해 6월 영진위가 진행한 ‘한국영화 성평등 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에서 2009~2018년 개봉한 한국영화를 전수조사한 결과 여성 감독은 전체의 11.5%에 지나지 않았다. 순 제작비 30억원 이상의 상업영화로 범위를 축소하면 단 4.1%만이 여성이 연출을 맡은 것으로 나타난다. 연출 외에 핵심 창작 인력으로 꼽히는 제작(15.7%), 프로듀서(23.4%), 주연(33.9%), 각본(25.0%) 모두 여성의 비율이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같은 기간 대학교 연극영학과 졸업생의 57.6%,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학생 중 32.3%가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교육 과정에선 오히려 남성보다 많았던 영화계의 여성 인력 상당수가 경력을 쌓고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전문가들은 성별 고정관념에 따라 직종을 구별하는 ‘유리벽’, 여성을 핵심 인력으로 채용하지 않는 ‘유리천장’이 영화계에서 여성 인력이 이탈하는 요인이 됐다고 지적한다. ‘영화는 남성의 일’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이를 반영한 산업의 관습은 여성의 자리, 여성 이야기가 결핍된 영화계 현실을 낳았다. <벌새> <우리집> 등 최근 여성 감독·주연의 독립영화들이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으며 두각을 드러냈지만 독립영화계의 현실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09~2018년 영진위 독립예술영화 제작지원 사업에서 장편 극영화 지원을 받은 감독 중 여성은 25.5%에 그쳤다. 지원 예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다큐멘터리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여성 감독이 48.8%에 달했다.

영화성평등센터장 임순례 감독
“불평등 바로잡기 위해 꼭 필요”

영진위의 성평등 지수는 “도와주세요”라는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산업 내부의 오래된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인 셈이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센터장을 맡고 있는 임순례 감독이 성평등 지수를 두고 “누군가에겐 여성에게만 특혜를 주는 정책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 동안 견고하게 유지된 불평등한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공적 기관이 당연히 시행해야 할 정책”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영진위 성평등소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조혜영 영화평론가는 “기회의 균등의 측면에서도 ‘성평등 지수’ 도입은 유의미하지만, 한국영화계의 질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여성 감독·주연 영화에서 그렇지 않은 영화보다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적 소수자를 재현하는 경향성이 높다. 다양한 인재 발굴을 통해 다양한 소재, 이야기를 만나고 이를 통해 다양한 관객을 포착하는 것은 위기에 봉착한 한국영화의 문제를 해결하고 시장의 이익을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한국영화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담보할 서사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공공기관에서의 성평등 정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앞서 스웨덴, 호주, 영국 등의 영화진흥 공공기관이 “성평등이 곧 영화의 질을 높인다”는 인식 속에서 성평등 정책을 꾸준히 펴온 이유다.

성평등 지수 도입 이후 영진위가 설정한 1차 목표는 2022년까지 지원사업 선정작의 핵심 창작자 성비를 5 대 5로 맞추는 것이다. 영진위 공정환경조성센터 최경진 팀장은 “공공기관에서 선도적으로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 핵심성과지표를 설정한 만큼 성평등 지수 시행 이후에도 분기 혹은 반기별로 평가해 보완해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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