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촌오거리 사건' 억울한 옥살이에 국가배상 판결..피해자는 법원에 오지 못했다

전현진 기자 2021. 1. 13.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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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약촌 오거리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힌 황상만 전 군산경찰서 형사반장(왼쪽)과 박준영 변호사가 1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출입구 앞에서 국가배상소송 선고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황상만 반장(전 군산경찰서 형사반장)은 한 재판의 선고가 끝난 후 알기 힘든 표정을 하며 법정을 나왔다.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많은 돈이라고 할 수도 없지.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흐르네….” 법원 서관 출입문 부근에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18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날 오전 8시 황 반장은 두툼한 모자와 목도리를 챙겨 쓰고 전북 군산시에 있는 집을 나섰다. 2014년 정년이 돼 경찰 제복을 벗은 뒤 시작한 행정사 사무소도 이날은 문을 닫았다. 3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서울에 있는 법원에 닿았다.

그는 점심을 먹고 도착한 법원에서 라디오 출연 일정을 마치고 온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와 만났다. 이날은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에 대한 국가배상 소송 선고가 있는 날이다. 황 반장은 변호인도 소송 당사자도 아니다. 그런 그가 굳이 시간을 내 먼 길을 왔다. 20년 넘게 지속된 이 사건의 마무리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황 반장과 박 변호사는 2000년 8월 전북 익산시 약촌오거리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상을 함께 밝혀왔다.

당시 15살로 배달 일을 하던 최모씨(37)는 택시기사를 흉기로 살해한 범인으로 몰려 10년간 옥살이를 했다. 황 반장은 군산경찰서 형사반장이던 2003년 진범이 따로 있다는 첩보를 입수해 수사했고, 용의자인 김모씨를 붙잡아 자백을 받았다. 김씨 자백은 범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구체적인 사실로 가득했다. 2000년 사건 당시 뭔가에 끼워맞춘 듯한 최씨의 자백과는 달랐다.

끝이 아니었다. 진범은 붙잡혔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다. 담당 검사는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 검찰은 진범 김씨에 대해 구속영장조차 청구하지 않았다. 결국 김씨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진범을 잡은 황 반장은 오히려 조직의 눈 밖에 났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갔다. 최씨는 꼬박 10년을 복역한 후 2010년 만기 출소했다.

박 변호사는 억울한 옥살이를 한 이가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최씨를 찾아갔다. 지금은 재심 전문 변호사로 알려졌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최씨를 설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설득 끝에 최씨는 2013년 4월 재심을 신청했다. 그렇게 ‘약촌 오거리 살인 사건’의 재심이 시작됐다.

재심 과정에서 박 변호사와 황 반장은 사건의 사실관계를 하나씩 맞춰갔다. 2000년 당시 최씨를 때리고 겁 줘 자백을 짜맞춘 경찰관과 진범의 존재를 알게 된 뒤에도 바로 잡지 않은 검사의 행태가 드러났다. 최씨를 수사했던 한 경찰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6년 11월 결국 최씨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같은 해 12월 진범 김씨가 강도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유죄가 확정됐다.

재심 판결로 사건의 실체는 바로 잡혔지만 최씨의 ‘잃어버린 10년’은 돌이킬 수 없었다. 최씨는 2017년 5월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박 변호사는 이 소송을 “최씨의 ‘목숨값’”이라 했다. 피고를 정하는 데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최씨의 억울한 옥살이는 한 두 사람의 잘못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혹독한 가혹행위로 최씨의 허위자백을 받은 경찰관 이모씨, 진범이 나타난 뒤에도 불기소 처분을 한 김모 검사, 그리고 대한민국을 피고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날 결과가 나오기까지 4년 가까이나 흘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5부(재판장 이성호)는 최씨와 그의 가족(어머니·여동생)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3일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피고가 공동으로 최씨에게 13억여원을, 그의 가족에게 총 3억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전체 배상금 가운데 20%는 전직 경찰관 이씨와 김 검사가 부담하도록 했다. 재판부는 최씨가 받아야할 배상금이 20억원이지만 이미 최씨가 형사보상금 8억4000만원을 받은 점 등을 고려해 배상금을 13억여원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위법한 수사로 무고한 시민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고, 진범에 대해 오히려 합리성 없는 위법한 불기소 처분을 했다”며 “이 같은 불법행위가 국가기관과 그 구성원들에 의해 다시는 저질러져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갖게 할 막중한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또 “원고들이 입은 평생 씻을 수 없는 피해는 원상회복되거나 결코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달리 대체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어 금전으로나마 피해의 일부라도 위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최씨 대리인인 박준영 변호사는 “재판 비용까지 모두 피고에게 부담하도록 했으니 청구 내용을 거의 모두 인정했다고 할 수 있다. 관련 공무원들의 책임도 인정됐다는 게 의미가 있다. 원고의 고통에 비하면 부족할 수밖에 없지만 법원에서 인정될 수 있는 충분한 금액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쉬운 점은 재심 과정에서 경찰과 검찰, 법원이 모두 사과했는데도 세금으로 소송을 하는 대한민국 대리인인 정부법무공단이 피해자의 주장을 반박하며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주장까지 했다는 점이다. 판결에 대한 불복 여부를 신중하게 판단했으면 좋겠다. 이씨와 김 검사도 개인적으로 최씨에게 사과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재판에 승소한 최씨는 이날 법원에 오지 않았다. “뭐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박 변호사는 선고 후 전화로 결과를 전해주며 물었다. 최씨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박 변호사는 “(최씨가) 재판 과정에서 힘든 일이 많았다. 관심을 끌게 될까 걱정하고 부담스러워 했다”며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배상금을 받은 뒤 주위의 지나친 관심으로 오히려 힘든 상황을 겪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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